서용주
제2부 수석합격/고려대 영문과 졸업
수기를 부탁받고 부담감만 안은 채 어떤 글을 써야할 지에 대해 감을 못 잡고 시간을 흘려보낸 지 벌써 6일째. 처음 공부 시작했을 때의 절박한 마음을 생각하며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공부 방법에 대한 글을 써야하는지, 아니면 이 시험에 대해서 나 자신보다 더 많은 기대를 안고 지켜봐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써야할 지, 더 나아가서 외교관으로서의 내 모습을 미리 그려보는 습작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었다. 단 한번도 합격 이후의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보람되고 알차게 써야 한다는 강박감조차 없는 것이 이상하다. 막연히 시험이 되면 좋겠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공부를 해 온 것 보면 외교관이 되어야 할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을 향해 열심히 돌진하는 것이 이 시험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제 축하차 방문하신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당신의 공직생활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동안 나는 내가 합격한 시험과 내 주위 사람들이 내가 붙었다고 생각하는 시험이 혹시 다르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시험 이후의 또 다른 목표물을 향해 내가 달려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고, 외무고시 합격이라는 관문이 미래의 한 시점을 염두에 둔 열쇠라는 생각을 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들의 축하 메시지는 곧 더 많은 짐을 나에게 부여하게 되고 더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는 듯 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것은 확실하다. 지금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해도 나의 과거에 근거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과가 될 것이 뻔한 것. 그래서 당분간은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부모의 딸, 동료들의 친구, 학생으로서의 신분으로서의 내가 아닌 내가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나라를 섬기는 공무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또 어떤 새로운 경험들을 선사할지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