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에서 행복이란 행복한 상태가 아니고 여러 풍부한 감정을 누적해가는 과정이라는 문장을 접했다. 뻔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마음에 와닿아 따로 메모해 두었다. 2023년도 2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지금,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해서 누적된 감정에 대해 써 보기로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공감해주시는 독자분이 조금이라도 계시기를 바라면서.
스트레스의 순간
로스쿨을 졸업하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그래서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변호사로서 처음 일을 시작해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일하는 것도 처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예컨대, 이 문서 초안의 레드라인(redline)을 보내달라는 이메일을 받으면 레드라인이 무엇인지부터 찾아보거나 주변에 물어서 현재 버전과 예전 버전을 비교하는 소프트웨어를 지칭한다는 사실부터 배워야 했다.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면서 비로소 많이 해서 익숙한 일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겼다. 이런 종류의 일만 계속하면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처음 해 봐서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변호사로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처음 해보는 일을 기꺼이 하려고 한다. 다만 업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 스트레스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윤리의식, 가치관에 맞지 않아서 힘든 일이라면 논외이지만 처음 해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후자의 스트레스는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업무가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업무라는 생각도 한다.
선택의 순간
해마다 겨울이 되면 뉴욕에서 보낸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을 생각한다. 로스쿨 졸업 후 일을 시작하기로 한 회사의 업무 시작 시기가 늦춰진다는 연락을 받은 몇 달 후의 겨울이었다. 뉴욕의 많은 로펌이 비슷한 결정을 했던 시기였고 정해진 업무 시작 시기까지 회사가 생활비도 지급했기 때문에 딱히 망연자실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 불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여의찮게 신입 변호사들에 대해 오퍼를 취소하는 로펌도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외국인인 나의 경우엔 얼른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뉴욕에 남는 선택을 했고 업무 시작 전까지 로스쿨 교수님 집필도 돕고 공익 법무 단체에서 일도 하면서 그 겨울을 넘기고 예정대로 업무를 시작했다.
환경이 어려워도 끈질기게 버텨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무 힘들면 그만두는 선택을 내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고민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지, 최근에도 비슷하게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계속해야 하나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힘이 되었던 말은 저축도 어느 정도 있을 텐데 정 힘들면 그만두면 되지, 물가 싼 곳을 찾아 유유자적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동갑내기 친구의 한마디였다. 결국은 좀 더 해보기로 했지만, 친구의 그 한마디에 묘한 깨달음과 용기를 얻었다.
뉴욕에서 그 겨울을 보낼 때, 지역신문에서 “지옥의 한 해도 끝나가니, 이제 축하하고 다시 시작하자”라는 문장을 보고 그 신문을 오려서 수첩에 붙여두었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일도, 기쁜 일도 있었던 2023년이었지만 다시 중첩된 감정을 반추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시기(또는 나를 괴롭히던 무언가를 연내에 그만둘 결심을 하는 시기)가 되었다.
박준연 미국변호사
■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에 수석 합격했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 ‘Latham & Watkins’ 도쿄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아태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글로벌 로펌인 ‘허버트 스미스 프리힐스’ 도쿄 오피스에서 근무 중이다.
필자 이메일: Junyeon.Park@hsf.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