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는 공간이 아닌 순간, 찰나이다. 창조란 경험을 파괴하는 잔인한 몰아의 몸짓이다. 소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인식이고, 과거의 경험이 무위가 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아니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새로운 창조의 시원이지 아니겠느냐는 듯 현대음악의 지평은 난해하다.
여름이 한창 달아오르던 때 노들섬 다목적홀 숲에서 “오늘을 위한 노스텔지어”라는 어긋난 조합이 절묘한 조화로 거듭나는 현상을 체험한 현대음악회에서 작곡가 임찬희의 “Being”을 만났다. 독일 브레멘에서 활동하는 재독 클라리네티스트 정나영과 독일과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리코더 연주자 이효원의 합주로 펼쳐지는 “Being”은 천지창조 당시 “소리”가 있었음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 말씀은 창조자의 말씀-의미와, 이에 호응하는 우주의 대꾸-무의미를 함께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절대자의 말씀으로 빛과 어둠이 강제로 절단되고, 하늘과 땅이 생살 찢듯 억지로 찢길 때 무력하게 순종해야 했을 흑암의 혼돈이 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는 단말마의 절규뿐이었을 것이다. 바로 소리였을 것이다.
작곡가 임찬희는 “Being”을 뒤돌아봄과 내다봄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임을 아느냐고 관객에게 묻고 있다. 머무름과 나아감, 과거와 미래의 시공을 초월하는 곳에 존재하는 현재를 심장 깊이 비수로 꽂으라고 속삭인다. “Being”은 스침을 통한 바람과 바람의 은밀한 애무를 통해 마치 흑암의 혼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신의 절규가 이러했을 것이라는 절박함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미 이효원의 리코더는 천진하고 감미로운 소리를 포기하고 있다. 아니 초월하여 임찬희 작곡가의 창조 세계를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다. 정나영 클라리네티스트 역시 목관음의 평안과 고요를 아주 냉정하게 일탈하고 있다. 파괴된 시공은 이렇게 다시 또 파괴를 통해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내디딜 수 있는 것 아니겠냐며 연주에 몰입한다.
음악은 우리에게 경험으로 싸이는 두께 없는 벽이다. 켜켜이 쌓인 인식은 모든 이에게 하나의 탑이 된다. 살과 피에 녹아들어 각자의 DNA가 되고, 인식의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가 된다. 태중에서 어머니의 태교 음악에 젖고,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쓰다듬으러 따스함에 젖어 든다. 익숙함이다. 까닭에 익숙함으로부터의 탈출은 쉽지 않다. 이미 높은 성이 되어, 거대한 힘으로 지배력을 자랑하고 있는 노스텔지어 음악세계의 파괴자, 이단아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치열한 용기가 필요하고, 천재적 창의성과 과감한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걷지 않는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내면의 고요가 있어야 하고, 한 명의 신뢰자를 찾는 순례자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찬희의 “Being”에는 기존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과거와 연결된 모방이 없다면서도 모방을 창조라고 강변하는 자기모순”이 없다. “Being” 듣기에 빠져드는 순간 관객인 필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동시에 떠올렸다. 음악 전체에 흐르는 혼돈이 깨어지는 굉음과 세상의 모든 기존질서가 파괴되는 파열음이 함께 어우러져 관객의 심장을 들끓게 하고,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든다. 창조와 파괴의 세계에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함을 실감케 한다. 두 연주자의 발걸음 소리로 시작되는 “Being”은 두 연주자가 음악 밖에 존재하는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 속에 내재된 음악 자체라고 얘기한다. 연주자들에게 리코더와 클라리넷의 본색, 그 고운 음색의 재롱 놀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음의 일탈로 나아갈 것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경험의 세계에 머무는 이들의 껍질을 과감히 깨버리라고 충동한다.
“Being”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한 흥미로운 도전장이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파격과 번뜩이는 예지로 멋진 “Being”을 세상에 내놓은 임찬희 작곡가와 그 난해한 곡의 맛을 제대로 살려 연주한 정나영 클라리네티스트와 이효원 리코더 연주자의 음악세계가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한다.
오시영 변호사, 시인, 전 숭실대법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