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27-반론 상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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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27-반론 상정하기
  • 손호영
  • 승인 2023.07.0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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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바둑기사 조치훈이 1985년 일본 최고의 기전 기성전(棋聖戦)에서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와 맞붙었습니다. 마지막 7번째 승부 61수까지 행해진 판에서 조치훈은 다음 수를 놓기까지 한 시간 가량이나 고민합니다. 마침내 착수한 뒤, 복도로 나간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습니다. “이것으로 한 집 쯤 이겼다.” 지나가던 기자가 우연히 들었습니다. 바둑은 159수에서 끝났고, 결론은 조치훈의 한 집 반 승리였습니다. 조치훈의 ‘100수 앞 수읽기’ 전설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내가 이렇게 두면 상대가 저렇게 둘 것이니 결론은 이러하겠다.’ 바둑에서는 나의 수에 대응할 상대의 수를 미리 예상하여 아우러지는 결과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른바 ‘수읽기’입니다. 바둑기사는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수읽기를 거듭 해본 뒤, 비로소 착수합니다. 조치훈은 100수 가량 너머까지 수읽기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신기(神技)나 다름없는 수읽기입니다.

바둑전문기자 이홍렬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프로는 두기 전에 생각하고, 아마는 둔 다음에 생각한다.’를 첫째로 제시했습니다. ‘수읽기의 차이’, 곧 ‘시야의 차이’가 둘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법률가들이 하는 논리의 설계도 바둑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주장을 마치 경주마처럼 직진으로 전개하다가, 숱한 반박을 맞다보면 처음부터 허술하게 논리를 설계한 것은 아닌지 뒤늦은 후회를 할 수 있습니다. 예상되는 반박을 고려하여 차근차근 풀어나갈 때 우리가 세운 논리는 정교함이 더해지고 완전함이 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증인이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듯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검사는 증인을 검찰청으로 불러 새삼 추궁했고, 증언 내용을 번복하는 진술, 곧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받아내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검사는 그 진술조서를 증거로 새로이 제출하였습니다. 당연하게도, 피고인은 진술조서를 증거로 함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진술조서는 증거능력이 있을까요?

대법원 판결(대법원 2000. 6. 15. 선고 99도1108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이미 증언을 마친 증인을 검사가 소환한 후 피고인에게 유리한 그 증언 내용을 추궁하여 이를 일방적으로 번복시키는 방식으로 작성한 진술조서’는 형사소송법의 소송구조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했다며 피고인이 증거로 함에 동의하지 않으면 증거능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수의견에의 보충의견은 다수의견의 결론에 동의하면서, 예상 반론을 미리 반박하는 방식으로 다수의견의 결론을 지지합니다. 바둑의 수읽기가 생각나는 지점입니다.

“실체적 진실발견이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함은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접주의나 전문법칙은 법관으로 하여금 정확한 심증을 형성하게 하고 피고인에게 증거에 관하여 직접적인 의견진술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실체적 진실발견과 공정한 재판을 달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개된 법정에서 위증의 벌의 경고와 함께 이루어진 선서를 하고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받으면서 한 증언보다 검사의 사무실에서 위증의 벌의 경고 및 선서와 피고인의 참여도 없이 일방적으로 한 진술이 실체적 진실발견에 더욱 유용하다는 논리는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아니하...므로, 실체적 진실발견을 내세우는 반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다수의견에 대한 반론은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헷갈려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아니면 떨려서, 어떤 이유로든 증인이 법정에서 증언을 잘못할 수 있다. 검사가 증언을 마친 그를 불러 다시 진중하게 물어 차분히 진실한 내용을 말하게 할 수 있고, 이를 조서로 남길 수 있으니, 이 진술조서에는 증거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진술조서가 그저 한번 증언한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증거능력이 부정된다면 진실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견에의 보충의견은 반론이 아마도 이런 흐름으로 전개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오히려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반론이 추구(할 것으로 예상)하는 진실 발견에 도움이 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반대의견은 예상대로의 논리를 구사했고, 미리 반박된 덕분에 힘을 크게 쓰지는 못했습니다.

미리 내가 생각하는 내용을 시뮬레이션 하는 습관을 갖다 보면, ‘반론 상정하기’는 익숙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의 반박에 비로소 대응하는 것보다 미리 준비해서 논리를 설계한다면 보다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내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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