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때는 6·25 한국전쟁에 미군의 대거 참전을 계기로 미국의 새 문화가 홍수처럼 몰려들던 1950년대의 일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갈아치우면서 ‘남녀 칠세 부동석’의 구호는 옛말이 되어가고, 남녀 평등의 구호 하에 성 폐쇄에서 성개방의 풍조가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마침, 정비석이라는 소설가가 ‘자유부인’이라는 소설을 내어 크게 히트를 친 일이 있었다. 줄거리는 상아탑에 파묻혀 학문 연구에만 골몰하는 대학 교수 남편을 둔 아내가 외로이 집에 앉아 무료를 달래다가 춤바람이 나서 성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으로 엮어졌다. 이 소설은 대학 교수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으로, 교수를 곰팡이처럼 고루한 인생으로 매도한 것에 대하여 크게 흥분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서울 법대의 동료 교수인 한태연 교수의 이름과 비슷하여 더 분노했던지, 동 대학의 황산덕 교수가 총대를 메고 항의조로 이를 ‘대학 사회에 대한 중공군 40만 명에 해당하는 무서운 폭거’라고 규탄하는 글을 ‘대학신문’에 냈다. 정비석씨가 이에 가만 있을 리 없어 황 교수의 비난 글에 반박 글을 내어 더욱 화제가 증폭되었다.
이때는 흥에 겨워 홀로 추는 우리의 전통 춤은 가고, 안전(眼前)에 남녀가 짝이 되어 농염한 정이 통하는 서양식 사교댄스가 전개되던 시점이기도 하다. 댄스를 잘해 보려고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스탭의 도로토(트로트), 부르스 등 연습에 열을 내는 사람도 주변에 적지 않았다.
때마침 박인수라는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나 댄스 사교계에 큰 바람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1955년 해군 헌병 대위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남자이다. 이 남자는 훤칠한 키의 호남아로 많은 여성을 매혹시킨 한국판 카사노바였는데, 당시 여성 해방의 물결을 타고 유행하던 서울의 유명한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홀을 출입하며 수많은 젊은 여성을 유혹, 농락하였다고 한다. 요새 말로 여성을 ‘농단’하던, 그러한 풍류 애정행각이 지속되면서 꼬리가 길어지다 보니 상대 여성으로부터 ‘혼인빙자간음죄’로 피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의 재판 담당이었던 서울지방법원 권순영 판사가 심도 있는 심리를 하여 댄스홀을 출입한 70여 명의 여성이 이 남자와 놀아난 것을 밝히게 되었다. 정조를 생명처럼 여기는 전통이 이어지던 사회에서 여성의 성이 이렇게 무너졌는가를 개탄하는 한편 그와 교접한 여성 중 처녀성을 보유한 여성이 한 명도 없다고 보고 이 피고인에 대한 혼인빙자간음죄 부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판결 이유는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는 법이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당시 이 판결은 너무나 드라마틱(dramatic)하고 유명하여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물론 무죄 판결에 검찰은 상소하였으며 상소심에서는 농락 당한 여성 중 한 사람의 정조는 보호 가치가 있다고 보아 1심 판결을 뒤집어 유죄가 선고되기는 하였다. 권순영 판사는 그 뒤 서울지방법원 소년부 지원장으로 오랫동안 소년 사건의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비록 상급심에서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권 판사가 무죄 판결을 하면서 제시한 형사법상 법리는 민사소송상 권리보호의 가치가 없는 소는 부적법한 소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형사소송이든 민사소송이든 모든 법이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는 ‘국가에 의한 피해자의 법익 보호’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문제의 혼인빙자간음죄는 2009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하였으며 3년 뒤 형법을 개정하면서 이를 폐지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판지(判旨)는 ‘남성이 혼인약정을 하였다고 해서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착오를 형벌로 보호한다는 것은 국가 스스로 여성을 유아시(幼兒視)함으로써 열등한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로 귀일하는 법이다. 헌법소송에서도 보호의 가치 없는 사건은 부적법한 소로 취급한다. (하지만) 보호의 가치가 있는 사건임에도 인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켜 보호의 가치가 없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안 된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가 그렇게 만든 것 같은 사례를 한 가지 든다. 노무현 대통령 때에 생겼던 일이다. 언론이 너무 드셌던 모양이다.
2007년 7월 22일, 국정 홍보처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소위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마련하여 정부부처별 기자실을 폐쇄하는 이른바 ‘출입기자실 대못박기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반발한 언론기자들이 ‘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하여 바로 그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3월 17일에 정부부처는 그 방안을 폐기하고 종전처럼 부처별 기자실을 부활시키는 원상회복을 하였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대못을 박았을 때에 제기한 사건을 접수 1년 반 가까이 묵혀두며 끌다가, 새 정권이 들어서 이른바 ‘대못’을 빼고 난 뒤인 2008년 12월 26일에야 비로소 ‘이 방안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으므로 헌법소원 청구인들에 대한 침해행위는 종료되었으니 주관적 권리보호이익, 즉 소의 이익이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부적법 각하 결정을 하였다.
가처분 결정으로도 기자실 폐쇄의 위헌 여부를 가릴 만큼 긴급성 있는 가처분감이기도 하고 시사성이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본안 사건을 접수한지 1년이 훨씬 넘도록 끌고 갔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권이 물러나고 새 정권인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 언론 정책이 바뀌어 기자실이 회복된 뒤에서야 비로소 재판관들의 심적 부담이 없어진 상태에서 본안 판단 없이 각하 결정을 하였다.
이는 거센 비판을 면치 못한 사건이 되었다. 헌재가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과 사건이 폭주한 것도 아닌 헌재에서 헌법 제27조 제3항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스스로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경우는 독일 민법 제839조가 규정한 바 소송지연시의 국가배상책임도 문제될 수 있는 것인데, 사건 당사자가 만일 여기에까지 끌고 갔다면 점입가경의 역사적인 헌재사건이 되었을 것이다.(졸저 <민사소송법입문(개정판)>, 141면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