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락 빠진 청년들, 잊고 있던 내 모습”
재단출연 5억, 퇴직금 1억까지 남김없이 내놓아
형사피고인 긴긴 사연 끝까지 듣고 눈물로 변호
“남을 위하는 행복, 내 자신이 가장 크게 누려”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세찬 파도를 수없이 맞아 매끄럽게 마모된, 바닷가의 흑빛 자갈과 같이 온유한 눈을 한 그였다.
70고개 하고도 반절을 넘어가고 있는 그이지만 “아직도 건강이 있으니 더 봉사할 수 있다”며 말간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난 1월 오윤덕 변호사는 가히 최고의 변호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명덕상을 서울지방변호사회로부터 수여받았다.
“역대 변협회장이나 요직을 지낸 법조인 등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람들이 받는 상이 뜻밖에 제게 주어졌어요. 제가 받을 상이 아닌데.. 한참을 생각해보니 ‘봉사에 힘써 온 지난 날을 변호사 분들이 격려해주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법조계에서는 그의 선한 행적에 대해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오 변호사는 “봉사는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능력이 많이 모자라도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자기 위안을 얻는 행위지요“라며 유별나지 않다는 듯 넘기려 했지만, 인터뷰를 위해 찬찬히 되짚어준 그의 지난 날을 따라가보니 명덕상만으로 그의 삶을 온전히 다 칭송하기란 퍽 어려워 보였다.
“돈은 물과 같아서,
흘려보내지 않으면 썩는 것”
지난 2003년, 오윤덕 변호사는 평생 모은 재산 5억 원을 들여 신림동 고시촌에 100평 건물을 임차하고 기부 없이 자비량으로 운영하는 ‘이 땅의 청년들을 위한 열린 쉼터 사랑샘’을 열었다. 사랑샘에는 의자 100석을 갖춘 강연을 위한 공간, 3개의 심리 상담실, 차실, 기도·명상실 등 다양한 공간을 갖췄다.
차실 벽 한 면에는 청년들을 위해 직접 쓴, 7연 133행에 이르는 장문의 기도문 ‘사랑하는 청년들아’를 내걸었다. ‘뜻은 높게 두고/ 생각은 깊게 하고/ 이웃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폭 넓은 삶을 살아가는 희망에 찬 그런 큰 꿈을 꾸어라...’라고 시작되는 이 긴 기도문은 청년들을 위해 흘린 그의 눈물방울이 곧 글자로 체화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수만 명의 고시생들이 살고 있는 삭막한 고시촌에 그가 비단 돈만을 들고 온 것이라면 그의 삶이 주는 의미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청년들에게 건네줄 생명의 온기와 그들과 함께 흘릴 눈물,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 앞에 청년들을 대신하여 올려드릴 ‘기도하는 무릎’을 가지고 왔기에 더욱 값졌다.
평생 모은 돈을 일면식도 없는 남을 위해 내어놓는다는 것은 말로만 하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돈에 대한 그의 관념부터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함석헌 선생이 그러셨지요. 돈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다. ‘원’이나 ‘전’과 같이 돈을 나타내는 말은 다 그런 의미가 들어있어요. 돈의 원리란 것은 물과도 같은 거거든요. 고이면 썩어요. 돈을 나만 움켜쥐고 있는다면 썩는 거죠. 자기 형편과 처지에 따라 개울이면 개울, 강이든 바다든 그만한 양껏, 주변에 흘려보낼 수 있는 양을 흘려보내줘야 상생이 되는 겁니다.”
그가 선뜻 내어놓은 자선의 돈은 결코 쉽게 모아진 돈이 아니었다. 그가 누릴 수 있는 찰나의 기쁨들을 다 고이 접어둔 채 정성껏 모은 돈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겪은 아픔으로 남의 아픔을 보듬다
“준비기간까지 합해서 10년을 고시촌에서 살았죠. 임차했던 건물이 2011년에 재건축에 들어갔으니까 내 60대는 고시촌에서 다 지나간 거예요.”
오 변호사가 특별히 고시촌을 품게 된 이유는 그 자신이 사법시험 준비시절을 죽음의 나락 속에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초 뚜렷하고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어서 고시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 당시 ‘공부 좀 한다’ 하면 고시에 도전했고, 오 변호사 역시 취업보다 고시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에 수험생활을 택했다.
그러나 몇 번 낙방을 하고 나서야 시험을 대하는 그의 자세가 안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그였기에 기말고사 준비하는 정도로 열심히 하면 되는 시험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시는 그게 아니었어요. 인생을 다 던져서 차원이 다른 열심으로 승부를 하는 것이더군요. 그 때 또 폐결핵까지 걸려서 몸이고, 정신이고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죠.”
계속되는 고시 낙방으로 깊은 좌절감으로 빠져들게 된 그는 한때 스스로에게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러 번 되뇌일 만큼 출구가 없어보이는 절망의 나락으로 던져지기도 했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제발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나가게 해 주신다면 남을 도우며 사는 선한 법조인이 되겠다’는 다짐과 간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했던 마음은 사법시험 합격 통지를 받고 관료가 된 이후부터 차츰 무뎌져 갔다. 합격을 위해 간절히 드렸던 기도의 내용 또한 까마득히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 변호사는 고시를 준비하겠다는 자녀의 공부 환경을 둘러보기 위해 고시촌을 방문했다.
1.5평 남짓 되는 비좁은 방에서 나와 슬리퍼를 끌고 거리를 오가는 고시생들, 골목 끝에 서서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그는 비로소 잊고 있던 젊은 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내 자화상이었어요.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모습. 이 고시생들의 아픔은 그와 같은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거든. 아예 안 봤으면 모르는데, 이미 봤으니 지나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시작된 거예요. 제가 겪었던 그 아픔을 똑같이 겪고 있는 그 청년들을 위해 저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음의 문턱 서성이는 청년들에게
생명의 길 전하기도
“청년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흐느끼며 죽고 싶다는 거야. 모두가 젊음을 다 바쳐 치열하게 공부하고도 단 몇 프로의 사람만 합격하게 되는 것이 고시니까, 너무 많은 패배자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승자에게만 박수를 보냈지, 열심히 하고도 패자가 된 이들에게 누가 따뜻한 말 한 마디 했었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고시촌에 차린 열린 쉼터 사랑샘에서는 사회 유명 인사들을 초빙해 강연을 자주 개최했다. 명사들이 만나러 와서 좋은 말을 해 주고 격려해 주면, 청년들이 자존감도 높아지고 동기부여도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밖에 봉사자들은 청년들의 심리 상담도 해주었고, 다도와 산행 그리고 떼제 공동체 기도 등으로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다방면에서 세심하게 그들을 챙겼다.
하지만 ‘판사 출신 변호사가 생계 활동을 중단하고 가진 돈 털어 고시촌을 돌본다’는 소식에 모두가 고운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하려는가’라는 의심의 눈총을 받게 되자 오 변호사는 찾아오는 청년들 그 누구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자생적 조직도 만류하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시생들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죽음을 다루는 학문은 종교 뿐’이라는 생각에 청년들에게 종교를 권하기도 했다.
죽음 뿐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삶의 여러 문제를 종교로써 헤쳐 나가길 바라며 그들에게 ‘보편종교라면 특정 종교에 구애됨 없이 각자에게 합당한 종교를 통해 신념을 가지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한 것.
오 변호사의 인도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생명과 삶의 희망을 되찾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났다. 오 변호사를 따라 세례를 받은 청년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70 고령이어도 건강 있는 한 봉사할 수 있어”
그가 고희를 맞게 되면서, 고시촌에서 떠나야 할 상황이 찾아왔다. 임차했던 건물 전체가 재건축에 들어가게 된 것. 아울러 보증금으로 주었던 돈이 함께 반환됐다.
그 보증금은 애초에 돌려받으리라 생각지 못한 돈이었다. 건물의 권리 관계가 워낙 복잡했는데, 그 동네에 그만한 건물을 달리 구할 수가 없어 ‘보증금을 버리더라도 사랑샘 봉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임차하여 들어간 건물인 것이다.
오 변호사는 그동안 일체의 기부 없이 자비량으로 봉사를 해 오다가 이제 칠순에 접어들어 체력도 부치게 된 시점에서 생각지 못했던 보증금을 돌려받게 되자 ‘이 쯤에서 고시촌 봉사활동을 접고 보증금 나온 것으로 여생은 아내와 좀 편안히 살아보자’는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 변호사의 동반자이자 사랑샘 쉼터 봉사를 한결같이 동역해 온 권혜옥 여사는 “한 번 사회공헌에 내놓은 돈이 어쩌다 돌아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선뜻 취해서는 안 된다”며 단호히 만류했다.
“이 보증금을 우리가 못다 한 제도권 밖 열악한 환경에서 면학을 이어가는 청년들을 위해 값지게 써줄 뜻에 동참하는 단체를 물색하여 기부를 하자”고 제안을 하더란 것이다.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오 변호사는 이러한 취지를 받아들여줄 재단을 찾아 나섰다.
그 때 오 변호사는 우연히 신영무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신 협회장의 표현대로라면 그 때의 만남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하신 것’이었다.
오 변호사의 근황을 물어온 신 협회장에게 그가 상황 이야기를 하자, 신 협회장은 대뜸 “오 변호사님이 해오던 일이야말로 원래부터 변호사 단체가 했어야 할 일입니다. 오 변호사님 하시던 봉사정신을 우리 협회가 이어받아 이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라며 손을 맞잡더라는 것이다.
오 변호사가 말했다. “신영무 협회장님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변호사의 공익활동에 일찍부터 눈이 떠진 분이지만, 대한변협의 성격 자체가 태생적으로 회원의 권익을 위하는 단체라는 한계가 있거든요. 최근에는 인권옹호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때는 ‘우리가 하던 어려운 이웃에 대한 돌봄을 열정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까’란 염려가 들었어요. 그래서 선뜻 대답을 못했죠.”
그렇게 머뭇거리는 오 변호사의 결단을 도운 것은 이번에도 권혜옥 여사였다. 그녀는 “변호사들께 우리가 못다 한 이 소명을 맡기자”며 “그 분들이 하다가 잘 안 돼서 이 돈을 다 쓴다 하더라도 그렇게 뿌려진 씨앗은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또 한 번 아내의 권고를 수용한 오 변호사는 곧 그 돈을 대한변협에 기부했고, 2012년 대한변협 산하에 ‘재단법인 대한변협 사랑샘재단’이 설립됐다.
오 변호사는 당초 대한변협에서 사랑샘의 봉사정신을 수계하는 사회공헌활동이 어느 정도 정착되면 떠날 요량으로 이사장직을 고사, 상임이사라는 직함에만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협회장이 바뀌고 변협이 사랑샘에 전담 직원이나 전용 사무실을 할애해 줄 형편이 안 되어, 잔일부터 기획과 실행 등 모든 업무를 오 변호사가 직접 도맡아 처리해야만 했다.
신 협회장 이후로 2명의 협회장을 거치는 때까지도 사랑샘에 대한 사무공간과 전담직원은 배정되지 않았다. 봉사란 열정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오 변호사는 ‘그나마 열정의 불씨마저 꺼지고 말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한다.
급기야 오 변호사와 재단 임원진은 2015년 9월, 대한변협으로부터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말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70 고령이란 핑계로 봉사를 쉬어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을 신이 꾸짖는 게 아닐까...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아직 건강이 남아 있으니 도망갈 생각은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봉사를 재개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근자에 수익을 위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그는 재단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봉직하던 법무법인을 퇴직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1억 6,200만 원 중 1억 원을 사랑샘 재단에 기부하고, 5,000만 원을 오 변호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법대장학재단에 기부, 나머지 1,000만 원은 평소 돕고 싶었다는 한 수녀회에 기부했다.
현재 대한변협으로부터 독립한 재단법인 사랑샘은 ① 뜻있는 청년공익 변호사들을 발굴하여 이들로 하여금 외국인근로자·이주민, 아동‧노인·노숙인 및 북한이탈주민의 권익옹호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② 공익변호사들의 비영리 공익활동 중 우수 프로젝트를 선정 지원하며 ③ 청년변호사상(준법‧봉사) 시상 ④ 저소득층 행정·사법 고시생·새터민 로스쿨생에 대한 장학금 수여 ⑤ 지역아동센터 운영 지원 ⑥어려운 곳들을 격려 방문하는 등의 봉사 일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가 형사 사건을 많이 다루는 변호사일 수 있었던 이유
민사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원을 떠난 오윤덕 변호사는 변호사 개업을 해서는 돌연 형사 사건을 많이 다루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 사연을 묻자 ‘듣는 은사(재주)’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그는 답했다.
“법원에 있을 때는 듣고 싶어도 당사자 이야기를 무한정 들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몰랐는데, 변호사가 되고 보니 제게 듣는 은사가 있는 거예요. 변호사들도 항상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보통 형사사건 피고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구성요건과 관련된 사항과 양형자료 정도가 확인되면 중간에 왕왕 잘라버리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 당시의 구치소란 에어컨도 없고 히터도 없어 여름에는 바깥보다 더 덥고 겨울에는 바깥보다 더 추웠다. 냄새나고 음산한 그 곳에 변호사들이 오래 머무르기란 쉽지 않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윤덕 변호사는 사정이 달랐다. “구치소에 한 번 갔다 하면 접견 신청을 한 사람이 많아 점심도 못 먹고 앉아 이야기를 계속 들었어요. 그만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정상론으로 이야기할 것이 풍부해졌죠. 왜 그렇게 감옥 안에는 기구한 운명의 사람들만 있는 건지, 법정에 서면 내가 완벽히 이 사람의 대변인이 되어 있는 거야. 눈물 콧물 다 빼가면서 변론을 했죠.”
그를 만났던 의뢰인들이 그에게 공통적으로 건넨 말은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준 사람은 오 변호사님이 처음입니다”였다고 한다.
경찰에서 하소연하면 검찰 가서 이야기하라고, 1심에서 이야기 하려면 항소심 가서 이야기 하라고, 항소심에 가면 또 대법원에서 이야기 하라며 떠넘겨 버리기에 정작 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오 변호사가 형사 피고인들을 만나면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줄 테니 우선 변호사를 감동시켜 달라. 변호사가 감동받은 게 없는데 무슨 수로 검사나 판사를 감동시켜 당신의 억울함을 풀어드릴 수 있겠느냐? 나를 감동시키는 유일의 길은 진실을 말하고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어 내가 당신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 달라. 그러면 나도 내가 당신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억울함을 법정에서 대변하여 호소해 드리겠다.”
그렇게 구치소를 다녔더니 면담 신청자가 자꾸 늘어났다.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가 동이 트자마자 또 사무실로, 법정으로, 구치소로 달려가는 생활을 꼬박 8년을 했다.
“저는 구치소 갈 때마다 다른 변호사들은 아무도 안 가져가는 이것을 꼭 챙겨갔어요. 구치소에 반입이 안 되는 물품이 많은데, 이건 그냥 통과지요. 이게 뭐냐면 휴지예요. 휴지를 가방 한 가득 넣어가지고 가서 의뢰인들 눈물 닦으라고, 그들이 울면 내밀고 울면 내밀고 했죠.”
그러나 선의로 무장한 그를 낙담케 할 야속한 순간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상대로 성공보수금 이야기를 끝내 하지 못했는데, 출소한 의뢰인들은 대부분 성공보수를 가져오지 않고 연락조차 끊어버리더군요. 한 해 두 해 이런 지경이 쌓이자 ‘내가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변론하였나? 영혼까지 이들에게 판 것이 아닌가?’ 하는 배신감마저 들었어요. 이 배신감 때문에 제 성격을 다 버리겠다는 위기감이 찾아왔죠.”
이렇게 미망에 빠져있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생각이 전환되는 것을 경험했다. 보통 사람은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어쩌면 그만이 품을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오 변호사는 말했다. “저 어려운 사람들이 컴컴한 감옥에서 나와 이 사회에서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정착비용이 들 테고, 국고가 허락되는 문명국가였다면 당연히 이들의 사회정착을 위하여 그 최소한의 비용을 감당해주었어야 합니다. 하나 국가가 충분히 돕지 못하는 그들을 국가로부터 변호사 자격을 받고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는 제가 국가 대신 이들을 도울 기회를 얻어 그 책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좋더군요. 그 어느 소설보다 심금을 울리는 이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를 제가 변호사가 안 되었더라면, 또 그들의 변론을 맡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구구절절 들어볼 수 있겠어요?”
인터뷰를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그는 여전히 자신의 선함이 별반 대수로운 게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인터뷰 김주미 기자, 사진 조병희 기자
항상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