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강사
1. 발해를 둘러싼 논쟁의 원인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학계의 주장이 각기 다르다. 그것은 발해사에 대한 기록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면이 크다. 즉, 발해인이 직접 쓴 정사(正史)류의 기록이 없는 점이 발해사 연구를 가장 어렵게 하고 있다.
발해에 대한 기록은 중국측 역사서가 활용될 수 밖에 없는데, 발해의 종족 계통을 보여 주는 중국의 기록들이 각각 그 내용상 혼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을 언급하면서 발해의 멸망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구당서’(945)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하면, 이보다 115년 늦게 나온 ‘신당서’(1060)는 고구려와 다른 듯한 ‘속말말갈인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이 결국 후세인들로 하여금 발해를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하고 또는 고구려인과 계통을 달리 하는 말갈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함으로써, 한국사에서 발해의 자국사 논쟁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조영의 본래 모습은 ‘고구려의 속말(송화강)지역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외의 장애요인으로는 현재의 국가적인 이해 관계 때문이다. 발해의 영역이었던 지역이 현재는 북한, 중국, 러시아의 영토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 문제가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2. 중국의 왜곡된 발해사 인식
남한과 북한의 기본적인 발해사관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로서 황제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발해의 자주성을 부정하고 책봉과 조공기록에 근거하여 ‘당나라의 지방 정권’인 ‘홀한주도독부’ 내지 ‘발해군’으로 간주하고, 그 건국의 주체에 대해서도 고구려 유민과 다른 ‘말갈’이라고 한다.
즉 발해사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인 중국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고구려사보다 한결 자신 있는 입장에 있는데, ‘신당서’ 등 중국 중심적 기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본래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 문제에 대해 1980년대 이전에는 학문적인 언급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고구려나 발해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 성립되면서부터 일각에서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중국 정부 내부에서도 비판 혹은 비난 또한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인 학자이자 관리로 주은래 총리가 있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하여 중국 학계가 학문적으로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고 본격적으로 주장한 시기는 문화대혁명이 지나고 ‘통일적 다민족국가’ 정책이 국가 이념으로 정착되는 1980년대부터였다.
3. 남북한 학계의 통일적 견해 - ‘황제국 발해’
이와 같은 중국의 발해사 연구에 대하여 가장 큰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 것은 남북한이다. 그 이전에는 18세기 유득공이 그의 ‘발해고’ 서문에서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이 가장 앞선 것이었다.
실학자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았으나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일본 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일부 사학자들과 북한학자들은 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고구려유민이었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발해의 자주성은 왕조의 ‘사사로운’ 연호와 시호 사용 및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외교행위 등에서 알 수 있다.
남북한이 발해국의 자주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남북국의 성격에 대해서는 적잖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북한은 발해와 양립하였던 신라에 대해서 ‘후기 신라’라는 인식 아래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북한의 생각은 현재 일부 우리 학자들의 인식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단지, 북측은 신라의 삼국 통일을 근본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반면 남한의 학자들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일부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즉, 신라의 삼국 통일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되는 668년에서 698년의 30년에 불과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4. 기타 국가의 발해사 연구 동향
한편, 발해의 동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에서도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연해주 확보와 함께 근대적 고고학 연구 등이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것은 정치적 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적 탐사와 발굴에 의해 일찍이 발해 유적을 확인한 러시아는 발해사를 지금의 중국 견해와 달리 당나라 지방 정권이 아닌 자주적 왕조였음을 인정하고, 다만 고구려 유민과 다른 말갈인들에 의해 건설된 왕조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사적 귀속 문제에서는 발해가 한국사, 중국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국 ‘말갈사’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발해사 연구는 일제의 만주 침략부터 본격화되었다.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지만, 발해 유적 발굴과 함께 진행된 일제의 연구는 근대 발해사 연구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하였다.
이는 현재 발해와 관련된 유적, 유물이 중국 정부에 의해 공개되지 않고 있는 형편임을 감안할 때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더군다나 일본의 시라토리 교수는 발해의 이원적 주민 구성설을 제기하여 오늘날 한국학계의 통설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제3자적 입장에 처해 있는 일본의 주장과 우리 학계의 주장이 어느 정도 상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물론 발해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치명적 단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