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을 진행하다 보면, A, B 두 가지 선택안이 각각 장단점이 있어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곤란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면접자들은 종종 절충설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개별 사안에 맞게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다. 헤겔이 주장한 正-反-合의 변증법대로 해결한다면 무엇인가 모두를 만족시킬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른바 절충설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절충설 자체가 존재하기 어려운 영역도 있고, 절충설은 대체로 막대한 관리 비용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절충적으로 현명하게 사안별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들이 적은 비용과 보수를 받고 현명하게 그 판단을 해주어야 할 때가 많다. 개개인으로서야 그러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제도적으로 지속가능한 제도인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형과 관련한 사안은 절충적 지점을 찾기 어려운 영역이다. 중죄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사형제를 긍정하는 견지에 선 것이다. 사형범들의 범죄 이력을 들어보면 사형을 반대하기가 어렵다. 수십 명을 살인했거나, 잔혹하게 살해한 케이스 등이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이들도 피해자 가족 앞에 서면 강하게 발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의해 모두 사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때 사형제도 폐지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낙태와 관련된 사안은 겨우 절충적 지점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이지만 논란은 있다. 엄마의 선택권(pro-choice)과 아이의 생명권(pro-life) 간에는 선택이 어려운 지점이 존재한다. 혹자는 강간 등에 의한 임신, 기형아 임신의 경우에는 낙태가 가능한 것 아닌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pro-life 진영에서는 그조차도 일단 낳고 입양을 하라는 입장이다. 착상이 되기 전이나 배아가 충분히 분열하기 전의 시점(ex. 임신 후 12주 이내)에는 낙태가 가능하고, 임신 말기 12주에는 낙태가 불가능하되, 그 중간 시점은 낙태 여부를 각 주정부나 나라마다 정하자고 할 수도 있는데, 태아의 시점을 자궁에 착상한 시점으로부터 본다면 이 또한 모두 낙태 허용론에 해당된다고 볼 여지가 높다. 그런데, 절충적 입장을 설령 취한다고 해도, 그것을 누가 판단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뇌사자 판단에 관해서는 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는데, 그만큼 비용을 수반하는 것이다. 많은 경계선에 있는 문제들의 사안별 합리성을 추구하기 위해 절충적 입장에 호소하곤 하지만, 그만큼 사려깊은 판단과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들어간다.
PT의 문답을 진행하다 보면, 면접관의 압박 면접에 직면하여 이러한 절충설로 도피하는 사례가 왕왕 있는데, 절충설은 모두를 만족시키기보다는 모두를 불만스럽게 할 수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과거 댐관리를 누가 할 것인지를 놓고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다투었을 때, 당시 총리였던 이회창 씨는 “댐의 수량 관리는 국토교통부, 댐의 수질 관리는 환경부”라는 혜안을 발휘하여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필자도 참으로 판사다운 좋은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국토교통부와 환경부는 어디까지가 수질관리인지, 어디까지가 수량관리인지를 놓고 다시 싸웠다. 요컨대, 문장으로는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절충적 답변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결국은 불가피하게 절충적 입장을 서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만능 도피처는 아니다.
비슷한 관점으로 예외적 해결, 특별한 보호에 관한 문제가 있다. 어느 제도이든 원칙적 처방이 아닌 특별/예외 처방은 최소화하는 것이 결국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게 된다. 어떤 부조리를 구원하고 구제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 예외적 문제 해결 방식을 고수하게 되면 계속 추가적인 특특별, 특특특별, 한 번 더 특특특특특별이 나와야 되는 경우가 정말 많아진다. 예외적 해결은 새로운 이해관계자를 낳기 때문이다.
세법은 본질적으로 정책적 목적과 탈법을 막기 위해, 예외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책적 차원에서 감세 내지 면제를 시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외의 적용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싸워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예외의 예외, 그 예외의 예외의 예외를 두면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게 된다. 세법은 그런 과정을 거쳐 복잡해지고, 전문가 집단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어느새 ‘조세정의’가 아닌 안정성 예측가능성이 더 중요해지는 상황이 된다. 요컨대, 개별 사안 구제를 위해 예외, 특별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러한 예외의 목록이 길어지면 과연 우리가 추구했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혼선이 생긴다.
제재와 구제 중 뭐가 맞는지 헷갈리게 되어 예측가능성을 더 중요시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누군가는 예외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사람이 생기는데, 그 사람에 대한 인성/인격에 대한 비난의 문제로 귀결될 때도 많다. 그 특별법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엉뚱한 사람들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별법 자체를 문리적/논리적으로 해석해서 적용받는 것 자체를 비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나쁜 의도를 욕하면서 인격을 비난하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냐면, 시간이 흐르면, 예외와 원칙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원래 예외는 최대한 자제해서 주장해야 앞뒤가 맞는데, 한정적으로 엄격한 요건 하에서만 인정되어야 하는 예외를 적극 확대해서 주장하게 되면 예외를 정말 조심스럽게 인정한 암묵적 규칙이 깨지면서 난장판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때그때의 개별 사안의 정의를 추구하다 보면 전체 시스템의 붕괴 위험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그리고 시스템이 붕괴하면 예외를 인정해 주면서까지 보호하려 했던 개별적 정의는 정말 사소한 가치로 평가받게 된다. 몇 년을 놓고 보면 개별적 구체적 정의를 구현하려는 것이 옳아 보여도, 몇십 년의 주기를 놓고 보면 그게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 삶은 간단치가 않은 것이다.
김용욱 인바스켓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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