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빙점 氷點(미우라 아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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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빙점 氷點(미우라 아야코)
  • 박상흠
  • 승인 2024.07.2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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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쓰치구치 병원장의 아내 나쓰에는 남편 게이조가 출장 간 틈을 타 자기방을 찾아온 고용의사 무라이와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 젊고 키 큰 의사 무라이는 남편과 달리 친절하고 매력이 넘쳤다. 피아노 건반 위에 도미솔을 연신 누르는 나쓰에의 볼에 스치듯 무라이가 가벼운 키스를 했다. 이 작고도 짧은 일이 벌어지는 동안 루리코는 유괴되어 훗카이도의 모범림 숲속 비에이 강에서 사이시로부터 살해된다. 게이조는 무라이와 나쓰에의 불륜을 상상한다. 그 시간 루리코는 살해됐다. 아내에게 따져 묻고 싶으나 참았다.

불임수술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쓰에가 여자아이를 입양하자는 요청을 받아들인 게이조는 유아원을 운영하는 절친 다카키에게 생후 3개월된 사이시의 딸을 부탁했다. 게이조가 유괴범 사이시의 딸 요코를 입양하는 목적은 자기를 배신한 아내를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후일 요코가 살인자의 딸인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쓰에는 요코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요코는 영리했다. 3살에 글을 읽기 시작했다. 상냥하고 인내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게이조는 요코는 살인자의 딸이라는 시선을 지울 수 없었기에 냉대와 무관심으로 대했다. 비밀의 시간 7년이 흘렀다. 남편의 서재에서 발견한 한 통의 편지. 다카키에게 보낼 편지 내용은 이랬다. 요코는 루리코를 살인한 범인의 딸이라는 것, 7년이 지난 지금도 요코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요코를 입양한 것은 루리코가 살해당한 날 나쓰에와 무라이가 단둘이 한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을 억누르지 못해 살인자의 딸을 나쓰에의 품에 안겨줬다는 것 등이었다. 요코의 신분을 안 나쓰에는 남편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친딸 로리코를 죽인 살인범의 자식인 요코에 대한 애증이 뒤섞이게 된다. 편지를 본 그날 귀가한 요코의 목을 조르고 거품을 토하게 한다. 요코는 갑자기 변한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고 모든 상황을 묵묵히 이겨낸다.

나쓰에는 점점 더 냉정해졌다. 요코는 자기 출생 비밀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오빠 도루가 집에 데려온 친구 기다하라는 요코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이야기가 오가던 중 나쓰에는 출생의 비밀을 기다하라에게 개봉한다. “요코는 루리코를 살인한 사이시의 딸이다.” 나쓰에의 말을 듣고 요코는 충격에 빠졌다. 루리코를 살해한 사이시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요코의 마음은 얼어붙은 빙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요코는 루리코가 죽은 모범림 비에이 강가 앞에서 자살을 결행한다.

요코는 눈 위에 앉았다 아침 햇살에 눈이 반짝여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속에서 죽을 수 있다니.’ 요코는 눈을 꽁꽁 뭉쳐서 강물에 적셨다.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칼모틴을 삼켰다. 요코가 응급실로 후송되고 유아원장 다카키는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 아니라고 밝힌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 게이조라면 범죄자의 자식을 맡길 수 있고 그렇다면 그 누구라도 입양할 자격이 된다는 신뢰가 있었다며 사실 요코는 대학생과 하숙집 아주머니가 간통으로 낳은 아이였다고 알려준다.

물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온도 빙점, 소설 빙점은 인간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사랑과 증오, 복수와 용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려준다. 소설은 인간의 빙점에 존재하는 ‘원죄 의식’과 함께 ‘인간은 어디까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는 게이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남편과 요코를 증오하는 나쓰에, 그리고 살인범의 딸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요코의 모습은 빙점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송에 지칠 때마다 늘 다시금 머릿속에서 꺼내 읽곤 하는 빙점, 어는점과 녹는점이 동일어임을 알려주는 빙점은 증오와 용서가 동전의 앞뒤와 같음을 깨우쳐준다. 빙점이 해부한 깊은 인간의 내면세계는 법률가의 길에 걷게 된 뜻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준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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