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버려야...난민은 우리 곁의 이웃, 형제”
“어필(APIL), 무거운 일 즐겁게 해나가는 곳”
“정부는 뚜렷한 난민 보호의지 가져야할 것”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이일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안국동의 어필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무실엔 가벼운 재즈풍의 음악이 흘렀고 한쪽 벽에는 강렬한 색감의 이국적인 벽화가 서너점 걸려 있었다.
넓은 창이 햇살을 그대로 통과시켜 실내는 환했고, 따뜻했다. 안내된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유리 화병에 꽂힌 목화 몇 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벽화도, 화병에 꽂힌 목화도 이 곳 어필 사무실을 찾았던 이주민들이 선물한 ‘마음’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난민의 아버지’라 불리는 변호사가 있다고 해 수소문 끝에 알아낸 주인공, 이일 변호사는 30대의 젊은 변호사다. 중장년은 되어야 얻을 법한 ‘난민의 아버지’란 별명을 일찍부터 자기 것으로 만든 점이 놀라웠다.
헌데 그 자신도 놀라는 눈치였다. “두 딸의 아버지인 것은 맞는데, 난민의 아버지라니요.(웃음)” 굵은 음색을 가진 그는 차분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밝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어필을 택해 난민 이슈 주력하기까지
사법시험 출신의 사법연수원 39기인 그는 군법무관 복무를 마친 후 첫 직장으로 어필을 택했다. “공익변호사가 되겠다는 마음은 확고했어요. 당시 공익변호사 단체가 몇 곳 있었는데 그 중 저와 가장 잘 맞다고 여겨지는 곳이 어필이었죠”
그가 꼽은 어필의 특장점이란 서로를 격히 칭찬하는 훈훈한 동료 관계, 밝고 자유로운 업무 분위기 등이다.
“하루 이틀 일하다 말 것이 아니니까 신중했죠. 당시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곳이 다 좋은 곳이었지만, 무거운 업무를 다루면서도 최대한 즐기면서 하고 싶었던 저는 단체의 정서와 분위기를 가장 크게 고려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해요.”
그런 그도 처음부터 난민변호사가 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공익변호를 전업으로 하는 것에는 결단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분야를 한정한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직접 사건을 접하기 전까진 ‘난민 이슈’가 가진 무게감을 짐작도 못했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어필에 들어와 난민 이외의 더 중요한 이슈들을 다뤄볼까’ 구상하기도 했다고. 그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사건을 맡아 일을 하면 할수록 ‘난민 이슈란 돕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 해결되지 않을 문제’임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일반 대중들을 이해해요. 직접 접해볼 기회가 적으니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저조할 수밖에 없고, 매스컴이 주는 한정된 정보로 오히려 편견을 형성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해 보여요.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최근 빈발하는 IS 테러로 인하여 조성된 중동 지역인들에 대한 기피현상이나 유럽발 난민위기 등으로 우리 국민들이 은연 중에 형성하고 있는 난민에 대한 경계감 등을 대할 때면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와 그가 소속한 단체 APIL이 소송 및 신청 외에 홍보와 교육, 입법운동이나 연대 활동에도 많은 힘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전에는 난민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 다가가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 난민들을 인식하게 하고, 이들을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정도였다면 요즘은 그에 더하여 이미 대중들이 은연 중에 형성하고 있는 난민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작업까지 하고 있어요.”
우리가 난민을 포용해야 하는 이유
우리 사회의 약자들인 장애인·성소수자·여성·아동 등에 더하여 ‘박해(나 박해의 위험)를 피해 나온 타국민’이라는 표지까지 하나 더 짊어진 난민이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라는 게 그의 인식이다.
이러한 ‘약자 중의 약자’가 우리와 같은 공간에 함께 살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느냐고 이일 변호사는 반문했다.
대한민국이 처음 난민정책을 시행한 이래로 지난 20여년간 받은 난민신청자의 숫자는 도합 2만 3천여명에 이른다. 최근 몇 년간 매해 꾸준히 3천~5천명의 난민이 ‘자국으로 돌아가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에 보호를 요청하는데, 이는 상당히 많은 숫자다.
하지만 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반론이 만만찮은 것. 국내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약자들이 있고, 이들이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이일 변호사는 차분한 어조로 반박했다. “썩 좋아하진 않는 비유이고 아주 적합한지는 의문이지만 이런 경우인 것 같아요. 우리 해상에 침몰하는 커다란 배가 있어 거기에 탄 사람들이 구조요청을 하는데요. 가장 좋은 건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구조요청을 하는 탑승객들을 구조해서 육지로 데리고 오는 정도는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사람의 기본 도리 차원이죠. 게다가 구조되는 것이 끝이 아니에요. 살아있다는 것이 인간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훨씬 많은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해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육지에도 도울 사람이 있으니 침몰하는 배는 일단 눈을 감고 모른척하자’라고 이야기할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요?”
침몰하는 배의 탑승객이 난민이고 육지가 대한민국이라는 설정이다. 이일 변호사는 이에 덧붙여 “약자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은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다 이루어져야 하지, 꼭 우선순위를 가려 택일해야 할 문제인 것처럼 ‘난민을 도우면 국내의 약자를 못 돕는다’는 식으로 구도를 형성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생각을 밝혔다.
한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난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한다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이 목격된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이 고도의 경쟁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에서 강하게 목격되는 특성이 있는데요. 나보다 강한 사람, 갑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한껏 굽신거리면서, 나보다 약한 사람이다 싶으면 마음껏 착취하고 괴롭히는 경향, 그래서 자신도 을이면서도 더 취약한 을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난민은 너무도 쉽게 괴롭힘의 타깃이 되어버리죠.”
이는 그가 주장하는 ‘난민들을 사회 안전망 안으로 하루빨리 편입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난민 소송,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하고 있나
그에 따르면 난민소송은 품이 많이 든다. 이는 아무래도 소송구조에서 오는 문제라고 이일 변호사는 진단했다.
일단 모든 입증의 책임이 난민에게 지워져 있고, 난민의 주장을 다 담기 위한 어마어마한 분량의 인터뷰가 필수다.
난민이 위협을 느끼고 도망쳐 나온 해당 국가가 지닌 문제를 조사해 제시해야 하고, 그 국가로부터 받은 자료들을 통번역해서 다시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상대방 측의 주장내용에 대한 반박 역시 치밀하게 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런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이일 변호사와 어필은 모든 난민 사건을 무한정 받지는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사건을 고르게 되지만, 그래도 상시적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월 평균 50여 건은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난민이 한국에 오는 경로는 다양하다. 어쩌면 그들로선 무작정 자국을 빠져 나와 ‘우연히’ 오게 된 곳이 한국인 경우가 더 많다.
또 인천 공항이 동북아의 허브 공항을 표방하고 있다 보니 난민들이 환승하는 과정에서 여권이나 비자의 문제로 붙들린 경우도 상당하다.
상대적으로 대한민국은 난민에게 문턱이 낮은 국가인 것도 사실이다. 아시아권에서 난민협약에 가입한 국가는 거의 없는데다가, 가까운 일본만 해도 난민 인정률이 우리의 100분의 1 수준일 정도로 엄격한 이민정책을 펴고 있다.
스포츠·한류문화의 열풍으로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에서 이미지까지 좋은 대한민국은, 난민들의 유럽행·미국행이 막히고 있는 현재로서는 아시아행을 택한 난민들로부터 선호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이렇게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눔에 있어 늘 맞닥뜨리는 장애는 역시 언어의 장벽일 것이다. 언어가 동일해도 나의 어려움을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뜻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언어가 다름에서 오는 소통의 어려움은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더니 이 변호사는 환히 웃으며 “모국어가 영어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아닌 난민들도 많죠. 통역분들의 도움을 받지만, 급하면 그 땐 서로 안 되는 영어로 되든 안 되든 마구 말해요. 소통은 영혼의 교감으로 이루어지더군요.(웃음)”라고 답했다.
특별히 난민을 도우면서 되레 이들로부터 상처받은 경험은 없는지를 물어봤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가 말했다.
“저희 변호사와 의지할 데 없이 타국에 나와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난민들 사이에는, 저희가 아무리 없애려고 노력해 본들 없어지지 않는 분명한 지위의 격차가 존재해요. 제가 그들로부터 상처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들리는데요. 피해의식이나 두려움, 불신 등의 감정을 갖고 있는 난민들이 변호사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진실만을 말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아요. 때로는 ‘이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했구나’란 생각이 들 때도 있죠.”
한 번 더 생각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어떤 도덕적인 당위를 이야기할 때 분명히 할 것은 ‘약자는 선하니까 도와야 한다’는 명제가 언제나 참은 아니라는 점인데요. 약자에게도 거짓과 악함이 존재할 수 있어요. 난민들의 경우 취약성, 그리고 사회 문화적 차이와 두려움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일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정부나 강자의 실수에는 우리들이 관대하고 약자의 실수에 유독 가혹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즉 그들이 설령 상처가 될만한 일을 내게 한다 하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있는 부분이라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네요”
난민과 어우러지는 사회 되려면...
난민을 ‘이웃’이자 ‘형제’라고 표현하는 이일 변호사에게, 우리 사회가 난민과 잘 어우러지는 사회가 되려면 정부와 법률가들, 사회 인식이 각각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 지에 대해 의견을 청해봤다.
그가 먼저 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처럼 대놓고 난민들을 못 들어오게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닌 척 하면서 뒤로는 막고 있었는데, 이 막는 것이 사실은 돌려 보내지도 않고 들여보내지도 않는 형태죠. 상당히 무책임하면서 실망스러운 부분인데요. 지난 해 어필 변호사님과 여러 프로보노 변호사님들이 함께 대리해서 승소한 사건인 시리아 난민 28명이 인천공항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게 됐던 그 상황도 바로 정부의 이런 태도 때문에 만들어진 일이에요”
즉 정부는 난민보호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보는 지금 정부의 난민에 대한 입장은 ‘난민협약을 비준했고 국제사회의 압력도 있으니 보호는 해야겠는데 적극적으로 할 필요는 없고 하는 모양만 취하자’에 가깝다.
정부의 난민에 대한 인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폐쇄적이라는 지적도 보탰다. 난민인정률을 높이라는 요구들에 대하여 정부가 내놓은 답변을 보면 “난민신청제도가 상당히 남용되고 있는데, 난민신청자 중 거의 대부분이 단순히 체류자격만 얻으려는 목적”이라는 잘못된 분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쉽게 말해 “저 난민입니다”라는 말에 대하여 “그렇군요”라는 긍정의 입장도, “근거는요?”라는 중립의 입장도 아닌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라는 부정적인 입장으로 응대하는 것. 그러는 한편 정부는 난민신청 숫자 줄이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정부가 이렇다보니 법원 역시 난민 사건을 단순한 업무부담으로만 여기며, 난민을 신중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신속히 종료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난민들이 느끼는 벽은 더 견고하다.
한편 이일 변호사는 동료 법률가들에게 “난민 사건을 맡았을 때 보다 정성을 쏟아달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난민 소송은 선례도 없고 승소하기가 어려운 반면 일은 간단치 않아서 변호사들이 형식적으로 ‘대리만 해 준다’는 느낌으로 도우시는 경우도 없진 않은 것 같아요. 소송단계에서 변호사는 난민들이 최후로 기대는 희망이란 걸 잘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법원에서도 보다 신중하고 적극적인 의지로 사건을 살펴봤으면 좋겠구요”
사회 인식의 측면에서는 난민 이슈를 ‘사람과 사람의 문제’로 여겨줬으면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대중의 인식은 언론에 많이 좌우되는데요, 얼마 전 언론이 시리아 난민 쿠르디의 죽음을 보도하자 한때 난민 이슈가 크게 주목받았죠. 하지만 IS 테러 같은 것이 한 번 보도되면 또 무게중심이 난민 거부 정서로 확 쏠려버려요. 난민 이슈가 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난민은 보호해야 할 우리의 이웃이자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할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사회가 가져주면 좋겠어요”
인터뷰 김주미 기자, 사진 강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