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촛불은 “어리석음으로부터의 자각”이다. 지난 주, 칼럼에서 필자는 “촛불은 질문이다!”라는 명제를 던졌다. 오늘은, 2016년을 마감하는 칼럼에서는 촛불의 의미를 “어리석음으로부터의 자각”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어리석음으로부터의 자각은 “촛불이 질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질문도 남이 나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묻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결론이다. “내가 어리석었었구나!”하는 자각이야말로 이번 촛불집회가 전 국민에게 가르쳐준 위대한 진실이다. 무심했었던 것에 대한 뉘우침, 자포자기했었던 것에 대한 후회스러움, 혼자만 도망치면 된다고 생각했던 자기애에 대한 모멸감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스승이었다. 바로 촛불의 진실이다.
지난주에는 김수영 시인의 “풀”을 함께 감상하였다. “풀”은 2007년 한국시인협회에서 현역 시인들이 추천한 시 1위에 올랐던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본다. 새해가 되면 한번쯤 고궁을 산책할 듯도 싶어서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밝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전문, 거대한 뿌리에 수록, 1974 간).
촛불의 진실이 타오르기 전 우리 모두는 김수영 시인이 자책하듯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의 주인공들이었다. 스스로 만든 공포의 올가미에 갇혀, 스스로 만든 송곳의 날카로운 감옥에 갇혀 스스로를 공포케 하였다. 박근혜라는, 아니 그녀의 아버지가 1961년부터 만들어 놓은 포악함과 잔인함의 공포에 전이된 그녀의 “공포의 감시망”에 갇혀 저 혼자 두려워하고들 있었다. 그래서 왕궁의 음탕함에 대해, 포로 경찰이 되라는 밀고자의 지위로 밀어넣으려는 암흑의 세력에 대해, 권력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구청 직원과 동회 직원에 대해, 재벌과 금력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땅 주인에 대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인을 억압하거나 붙잡혀간 언론의 억압자에 대해 제대로 분노하지 못한 채, 기름덩어리만 내 오는 설렁탕집 여주인에게, 야경꾼에게, 간호사에게 10원, 20원 때문에 시비를 거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촛불은, 그 흔들리는 촛불은 소시민이었던, 겁쟁이였던 우리 모두를 “위대한 시민임을 자각”케 하였다. 그리하여 어둠 속 권력자로 군림하던 그들을 촛불 앞에 내세우니, 그들이 그림자였고, 실체 없는 허상이었고, 탄핵의 대상이 되는 허깨비에 불과하였음을 알게 하였다. “참으로 별 것도 아닌 것이, 허 참!”하게 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사소한 것에 화를 내는 겁쟁이 아해들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당당하게 바로 서서 올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바꾸는 키맨이 되었음을 자각케 되었다.
박영수 특검팀의 맥 집기가 계속되고 있다. 요소요소에, 급소급소에, 침을 꽂고 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죄 진 자들이 한 놈도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꼼짝달싹 못하도록 숨통을 조여들어가고 있다. 특검팀의 용기 있는 의지, 결단력 있는 수사권 행사에 박수를 보낸다. 촛불의 힘은 “9급 공무원이 대통령에게 아닌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때까지 사회 개혁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지시이니까, 권력자의 지시이니까, 상관의 지시이니까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공무원들의 변명을 이번에는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공직을 맡는 자들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정부패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사회개조가 일어나야 한다. 촛불은 섬세해야 하고, 촛불은 꾸준해야 하고, 촛불은 투명해야 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의 삼성전자 합병절차,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관여가 국민의 손해를 전제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알려지지 않았던 7시간의 비밀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모든 국민이 진실하지 않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2016년 병신년이 저물어간다. 시중에서는 병신년에 병신년들이 병신짓을 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신문지면에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실제 시중에서 회자되는 표현 그대로 옮기자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적나라한 표현도 참으로 많지만, 그 기본 요지는 위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금년도 하루 남았다. 2016년은 진정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참으로 커다란 한 획을 그은 해였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함이, 어리석음이, 불통이, 탐욕이 유신독재로 상징되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포스러움과 최소한 남아 있던 미망의 끈을 싹둑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과거에 형성된, 은연중에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던 독재의 음험함을 밝은 세상에서 걷어낼 수 있는 집단지성의 힘을 결집할 수 있게 되었다.
박영수 특검은 박근혜 게이트, 최순실 게이트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가려내야 한다. 직접적 부역자들뿐만 아니라, 끝없이 연결되는 실핏줄로 숨어 있는 송사리, 피라미 부역자들까지 발본색원하는 자정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촛불을 든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휘젓고 있는 실핏줄 끝까지 특검의 칼날이 겨누고 있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언론기관에 숨어 있는, 교육계에 숨어 있는, 군부에 숨어 있는, 경찰과 검찰에 숨어 있는, 국정원에 숨어 있는, 재벌에 숨어 있는 그 실핏줄의 부역자들을 솎아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
김수영 시인은 말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 라고. 필자의 저서 “대표당사자소송”의 서문 “모래이야기”의 일부는 “이 세상은 사막이다. 사막은 모두가 길이고, 모두가 길이 아니다. 사막을 걷는 자는 오아시스를 만나든지 목마름을 만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는다. 몽골의 고비사막을 걸었고, 모래산 명사산을 올랐고, 페루의 와카치나 사막을 달렸다. 저 많은 모래알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거대한 산을 만들고 모래바다를 이루는 것일까? 어쩌면 태초의 태산의 일부였을 저 모래알들, 쪼개지고 깎여지고 다듬어져 생의 마지막 존재로 살아 숨 쉬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모래알을 집어 엄지와 검지로 맞비벼본 적이 있는가? 그대의 손바닥에 모래알 하나 올려놓고 다른 손 엄지로 누르며 쓰다듬어 본 적이 있는가? 그 모래알이 당신의 피부를 찌르듯 아프게 자극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모래알은 마지막 삶의 자존심이다. 머지않아 모래알은 더 닳아져 먼지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어쩌면 세상은 모래알의 존재를 그렇게 운명 짓고, 무시할지도 모른다. 모래알 스스로도 그렇게 자신을 폄훼하고 좌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욕망으로 세워진 저 바벨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저 마천루가 이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의 뭉쳐짐으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탑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작은 모래알의 힘은 강하고 세다. 삶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실존과 이데아의 경계에서 한 알의 모래알이 토해내는 에너지의 힘은 무한하다. 어느 누가 감히 모래알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후략)”이다.
태초, 태산의 일부였을 수도 있는 한 알의 모래알갱이, 작은 모래알의 힘은 강하고 세다. 촛불이 모여 탄핵정국을 성사시켰듯, 모래 알갱이들이 모여 마천루의 탑을 쌓는다는 사실을 김수영 시인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1968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지만, 김수영의 시적 정신은 지금도 살아 촛불 속에 녹아 있다고 하겠다. 올해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 토요일, 올 들어 마지막 촛불집회가 광화문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전개될 것이다.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들은 “정의로운 사회의 새로운 건설”을 부르짖을 것이다. 부패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직접 민주정치의, 시민의 소리를 외칠 것이다. 시대정신은 계속 진화할 것이고, 거짓을 외치는 가면쓴 자들을 향해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할 것이다. 시간은 진실의 편이다. 시간은 정의의 편이다.
필자가 2주 전 난파선이 되어 버린 새누리당에서 먼저 뛰어내린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 했더니, 결국 새누리당에서 30명의 국회의원이 탈당하여 개혁보수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변신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역사의 주인공 자리를보장해서는 안 된다. 부패의 기생지를 제공하며, 방패막이가 되었던 그들이 스스로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한 변신을 도모하는 것을 보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실체를 여전히 국민들은 지켜 보아야 하고, 끊임없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임은 집요할 만큼 물어야 한다. 그게 촛불의 의미이다.
촛불은 “어리석음으로부터의 위대한 자각”이다. 우리 모두 어리석었다는 자기 반성에서부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병신년, 원숭이해가 저물어간다. 올해의 가장 큰 사건은 “박근혜라는 권력의 최정점 원숭이가 권력나무에서 떨어졌다”일 것이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박근혜 권력이 땅바닥에 내동이쳐 졌고,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일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성형중독에 빠져 어린이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녀 왕비마마”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알다가 모르겠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이쁘니?” 아무리 물어도 거울은 대답한다. “백설공주”라고, 백설공주야말로 백만 촛불을 든,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켜며 선하게 살아온 민초들임을.
김수영 시인처럼 사소한 것에 화를 내고 살자. 그리고 촛불이 필요할 때는 모두 마천루를 이루는 모래알갱이가 되고, 집단지성을 불러 일으켜 나라의 물꼬를 바로 잡자. 병신년이 간다, 지긋지긋한 병신년이 간다. 이제 정유년 새해가 밝아온다. 진정 어둠이 물러가고, 새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함께 사는, 더불어 함께 웃는, 더불어 함께 손을 마주 잡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2017년에는 맞이해 보자. 독자분들에게 진정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한 해 동안 부족한 글에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으신 것에 감사드린다. 만에 하나 부족한 필자의 잘못된 글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이 있으시면 너그러운 용서를 바란다. 정말, 정의로운 사회가 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해피 뉴 이어!
닭뫼가지를 비틀어 새해를 맞이하면
반칙없는 세상 헌법이 지켜지는 세상에서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