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 기자
무엇인가에 고민에 빠졌거나, 형이상학적 고뇌에 빠진 듯한 조형물을 생각한다면 동양은 반가사유상, 서양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대표될 수 있다. 전자는 기원 전후부터 만들어지면서 불교문화권인 아시아 전역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만, 종교문화의 하나로 빗어진 탓으로 작가가 정체불명이지만 한결같이 반가상으로 번민에 잠긴 인간애를 한껏 담아내고 있다.
반면 생각하는 사람은 1880년에 프랑스의 로댕이 만든 것으로 고뇌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서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답을 찾고자 하지만 찾지 못해 고민하는 듯, 아니면 반가사유상처럼 인간존재의 극한 이치를 깨닫기 위한 고뇌에 찬, 한 건강한 남성을 보는 듯하게 한다.
세상 이치에 대한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도 견해의 차이가 있다. 두 작품을 두고도 어느 것이 더 좋은지를 두고 세상 모든 이들은 각각의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만약 동서양 예술 우위론을 논하는 토론회가 열린다면 견해 차이는 엄청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작품 정서에 대해서만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까 싶다. 의견이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 있다는 것이다.
출범 4년을 맞이하고 있는 로스쿨에 대한 긍정론자들은 그들대로, 사법시험 긍정론자들은 또 그들대로 각각의 옹호론을 펴는 형국이다. 특히 예비시험 도입을 두고 갑을논박이 짙다.
비록 변호사시험법 부칙조항에 의해 사법시험의 종말을 고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입법에 의한 폐지결단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의가치가 없으므로 더 이상의 사법시험 존치는 논할 실익이 없다는 로스쿨 옹호론자들의 논리는 분명 타당하다. 반면 2009년 사법시험 종말을 고하는 변호사시험법을 제정하면서 ‘2013년 재논의’라는 부대의견을 담았다. 따라서 사법시험 또는 예비시험 옹호론자들의 뒤늦은(?) 딴지도 분명 명분이 있다는 판단이다.
미국은 초창기 법과대학과 로스쿨을 선택하던 중 법과대학을 폐지하는 극단적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다. 반면 독일은 십수년전 고뇌 끝에 극단적 사법시험 제도로 회귀했다. 일본은 법과대를 존치시키는 이원적 제도를 도입했지만 로스쿨 위기론에 봉착하고 있다. 한국은 법과대를 잔류시키되 극단적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 로스쿨이 무조건 좋은 것도, 독일의 회귀가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제도라는 것도 각 나라의 국민정서와 법질서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상황을 보면 로스쿨 또는 사법시험·예비시험에 대한 첨예한 대립각은 비단 로스쿨 대 비로스쿨, 신생 법조인 대 기성 법조인만이 아닌 듯하다. 사법시험준비생과 로스쿨생간의 치열성은 더 짙다면 짙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며 견해의 차이에서 온다. 해결점은 “왜?”라며 상대측을 배려하는 자세에서 찾아야 한다. 한 울타리였던 법조·법학계가 다시 원만해지고 ‘법조인’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두고 불철주야 각고하는 사시생·로스쿨생간의 화해도 이 것 외에는 없을 듯하다. 그래야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상호 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