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만히 중심을 잡고 있기도 힘들 만큼 어지러운 변화가 우리나라뿐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큼, 오히려 옛날(?)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미국 로스쿨에 처음 진학해서 로스쿨 공부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얘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봤을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에 대해서이다.
일단, 엄청난 양
의무 교육과 대학 교육을 통해 긴 글은 꽤 읽어온 필자임에도 로스쿨 입학시험인 LSAT 독해 문제를 처음 접하고 나서는 긴 분량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버거웠다. 단지 지문이 영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같은 내용을 우리말로 바꾸어도 깜짝 놀랄 만큼 양이 많다. 로스쿨에 진학해 보니 LSAT 문제는 실제 로스쿨 공부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했다. 케이스북이라고 불리는 과목별 주요한 판례를 담은 교과서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 번에 읽을 양이 만만치 않았다. 긴 판례를 읽다 보면 조금씩 요령이 붙어서 읽고 이해하는 프로세스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나도 판결과 사실관계, 법적 추론 등을 다른 색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가며 교과서 여백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메모하면서 어렵고 긴 글을 읽는 연습을 했지만 힘든 과정이었다. 졸업하고 실제로 업무를 하면서 이 공부 역시 긴 글을 읽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해하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연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멀티 태스킹, 성격이 다른 과업을 병렬적으로 처리하기
게다가 로스쿨의 어려운 부분은 진득하게 앉아서 하는 공부뿐 아니라, 다른 활동, 클리닉 등 실무 참여 수업, 저널과 같은 과외 활동, 그리고 졸업 후를 내다본 구직 활동까지 진득하게 앉아 공부만 해서는 불가능한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하고 개인적으론 ‘공부 모드’와 ‘활동 모드’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경을 거듭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역시 일종의 훈련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진행중인 안건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하루에도 여러 종류의 안건을 동시에 담당하면서 마음가짐을 거기에 맞추어 갈아 끼워야 한다.
기말고사와 정신력 싸움
미국 로스쿨 대부분의 수업에서는 중간고사는 따로 없고 기말고사 결과가 성적을 제일 크게 좌우하고, 그 성적은 또 취업을 좌우하므로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특히 1L이라고 불리는 1학년 때의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도 1학년끼리는 기숙사 방을 같이 쓰게 하는데, 첫 기말고사 전에 나와 룸메이트가 기말고사 걱정된다고 이야기하는데 다른 룸메이트도 귀가하여 다 큰 어른 셋이서 울음바다가 된 기억도 있다. 1학년 1학기는 그렇게 뭘 잘 모르는 상황에서 지나가고, 1학기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2학기에 더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2학기도 다 끝날 무렵 마지막 기말고사가 있었다. 다른 로스쿨과는 다르게 모교 로스쿨에서는 행정법이 필수 과목이었는데 그 행정법 기말고사였다. 교수님이 수업을 재미있게 하셔서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수업이었는데 그래서 다들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시험공부도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정작 시험에 들어가 보니 큰 배점이 있는 문제로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셰브론 원칙이 출제되었다. 2학기를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이런 시험 문제를 보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같은 줄의 한 클래스메이트가 흐느껴 울었던 게 기억이 난다. 그걸 본 나도, 그 친구도 몇 초 후엔 정신을 가다듬고 답안을 작성했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면이 있지만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대신, 함께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다 보면 상심할 때도 많다. 그래도 크게 마음이 꺾이지 않고 계속 써나갈 수 있는 정신력이 지식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박준연 미국변호사
■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에 수석 합격했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 ‘Latham & Watkins’ 도쿄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아태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글로벌 로펌인 ‘Herbert Smith Freehills’ 도쿄 오피스에서 근무 중이며, Temple 대학 로스쿨 도쿄 캠퍼스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필자 이메일: Junyeon.Park@hsf.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