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상태바
[칼럼]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 최용성
  • 승인 2025.02.07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책을 많이 읽었다. 동시대 한국 작가보다는 외국 작가들을 더 위대한 존재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는 편견에 빠진 채 주로 외국 고전문학 작품들을 골라 읽었다.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필두로 반 다인, 아가사 크리스티, 이든 필포츠, 엘러리 퀸, 체스터튼, 딕슨 카 등등이 쓴 수많은 추리소설에 탐닉하였다. 그 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악령>을 읽고는 감전된 듯 전율하였다. 그 전율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조지 스타이너가 쓴 비평서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를 통하여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의 영성(靈性)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 시기에는 신학 관련 책도 많이 읽었는데, 이신 목사가 번역한 니콜라이 베르쟈예프의 <인간의 운명>에 큰 감동을 받았다. 최종고 교수가 번역한 라드브루흐의 법철학과 차용석 교수의 <형법총론강의>, 몽테스큐의 <법의 정신>은 법률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를 읽으면서 집단적 편견과 개인의 자유를 숙고하였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책, 글들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한 자기정체성의 형성은 나의 기질, 욕망, 내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교육, 개인적·사회적·국가적 사건들의 경험 등등과 연결되어 역사적·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유신체제, 전두환 군사독재체제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비로소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광주의 진실에 직면한 순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여야 했지만, 나는 여러 가지 변명을 내세우며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불의는 더더욱 심해졌고 1987년 6월 나는 처음으로 학교는 물론이고 시내로 나가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는 역사의 부름에 충분히 응한 것이 아님을 최소한 안다. 길고 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 죽거나, 다치거나, 장애가 남거나,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친족들마저 온갖 불이익을 받는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분들 덕분에 지금 말하고 글 쓸 자유를 맘껏 누리고 사는 나는 감사한 마음과 아울러 무임승차하였다는 죄송함과 부채의식을 갖고 그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려고 애쓴다(항일독립투쟁과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한 분들의 희생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인간의 도리라고 믿는다.

어수선하게 독서와 대학시절 일부 경험을 불러온 것은, 12·3 내란사태의 과정을 보면서 한강 작가의 화두가 뇌리에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는 나와 당신, 우리가 겪은 기억이고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 속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를 구원한다. 내가 읽은 책, 체험한 사건, 함께 했던 사람들이 어울려 만든 과거가 현재의 나에게 이른다. 1980년 광주와는 달리 2024년 12월 3일 밤과 4일 새벽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역사를 썼다.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시민들이 계엄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고, 군인들이 시민을 진압대상으로 보지 않은 그 변화는 바로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을 내란 및 군사반란으로 처벌한 판례가 존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서울의 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설과 역사학, 영화, 웹툰 등 대중매체가 다룬 내란의 비극과 희생자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누적되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거대한 흐름의 화룡점정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노벨문학상 수상이었을 터.

한강 작가의 화두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작은 친절과 보살핌, 사소한 배려와 공감을 받은 기억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그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나를 통하여 다른 이를 구원하는 작지만 큰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사소해 보이지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경이로운 깨달음을 주는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한강 작가의 화두에 대한 또 다른 답과 같다.

결국 제대로 기억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산 자가 잊지 않고 기억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 그래서 21세기에 내란의 위기를 간신히 벗어난 우리는 잘못된 미래가 오지 않도록 과거를 또 지금을 끊임없이 제대로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만난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