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저널=안혜성 기자]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영화 ‘아저씨’의 유명한 대사다. 현실감 없는 미모를 자랑하는 원빈의 현란한 액션이 돋보이는 영화로 잔인한 장면을 보기 어려워하는 데다 액션 영화 자체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기자도 봤을 정도로 크게 흥행한 영화다.
그래서 얼마 전 친구가 ‘오늘만 사는 기사’라는 웹소설을 추천했을 때 “원빈이 주인공이야?”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기사’라는 단어에서부터 ‘아저씨’와는 전혀 다른 장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는데 ‘오늘만 산다’의 의미도 완전히 달랐다. ‘아저씨’에서의 ‘오늘만 산다’가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의미한다면 ‘오늘만 사는 기사’에서는 오히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꿈과 희망을 나타낸다.
작중 세계관에서 ‘기사’는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단순히 일신의 무력이 강한 수준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도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나아가 세상까지도 바꿀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을 가진다. 그저 잘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 적어도 주인공 엔크리드는 그렇게 믿는다.
어린 시절 들은 칭찬 한마디를 계기로 기사를 꿈꾸며 노력을 거듭했지만 엔크리드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남들은 쉽게 배우고 익히는 것들도 엔크리드에게는 요원한 일이었으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도무지 발전이 보이지 않는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에 전념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차고 비웃기까지 했다. 너는 가능성이 없다,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봐라 따위의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도 꿈을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투에 참여했다가 적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엔크리드는 죽음을 맞이한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눈을 떴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몇 차례 비슷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 깨달았다.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지 않는 한 끊임없이 같은 날을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즉, 매일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분명할 일이 엔크리드에게는 축복이었다. 오늘이었던 어제 알게 된 것이나 익히게 된 것은 내일이었던 오늘의 그에게 남아 있었기에 같은 날을 반복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나가다 보면 아무리 재능이 없는 그라도 실력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죽고 또 죽었다. 재능이 부족했기에 1년이 넘게 같은 날을 살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비록 거북이처럼 느리게 기어가는 수준이더라도 엔크리드는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을 반복하며 엔크리드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라면 이런 부분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더없이 즐거워졌다는 것.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성장의 즐거움이 채찍과 당근이 되어 엔크리드의 등을 떠밀었다. 너는 더 할 수 있다고, 여기서 멈추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엔크리드를 보는 주변의 시선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의아했다. 아무리 봐도 재능이라고는 없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실력이 쑥 올라가니 어찌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 봤자 별 볼 일 없는 실력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변화한 그의 모습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 ‘노력에 배반당하는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응원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다. 점점 달라지는 그는 주변도 변화시켰다. 그를 따라 잊고 있던 꿈을 찾는 사람,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것도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엔크리드의 수없이 반복되는 ‘오늘’을 보면서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어, 이거 수험생들 얘기잖아?’였다. 엔크리드와 달리 날짜는 달라지지만 수험생들도 매일 같은 일상을 산다. 공부라는 게 하루하루 성장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공부를 한다고 실력이 나아질까, 합격할 수 있을까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공부를 한다. 그런 수험생들에게 엔크리드의 삶이 작은 응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남들이 뭐라든 흔들리지 말고 꿈을 향해 나아가길,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이 고통이 아닌 성장의 즐거움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