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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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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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3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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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이상하게도 러시아문학은 창녀를 성녀로 등장시킨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카튜샤가 그러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그랬다. 필자가 11년 전 첫 영장실질심사를 했던 울산지방법원의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 도끼로 머리를 상해한 사건이었다. 살인미수 사건의 배경은 이혼한 아버지와 멀어진 아들이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은 데 앙심을 품은 것이었다. 소송 기술상 살인미수가 아니라 특수상해죄로 판단되어야 함을 역설하였고 재판부도 이를 반영해 관대한 판결을 선고했던 기억이 난다.

근자에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한 유튜버가 다른 유튜버를 칼로 살인한 참혹한 사건 등을 접하면서 무조건적인 용서가 과연 타당한지, 살인자들의 인권 범위는 어디까지 보호되어야 하는지 재논의가 요청되고 있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함께 읽어보자. 살인의 시간이다. 휴학생 법학도 라스콜니코프. 그는 계획대로 전당포 고리대금업자 노파 알료냐를 살해한다. 범행 후 살인의 흔적을 모두 감추었지만, 양심의 가책은 숨기지 못한다. 그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이 느꼈던 두려움을 감지한다. 내면의 감옥 속으로 도망가는 주인공 뒤를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추적해 온다. 판사는 주인공이 작성한 대학 논문에 주목한다. “나폴레옹과 같은 초인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한 살인은 정당화된다.” 논문은 불의한 자산가의 돈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행동가의 출현을 요청한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던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살인 사실을 고백했던 대상은 창녀 소냐였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기 몸을 팔아야 했다. 아마도 주인공 눈에는 그녀의 모습 속에 여동생 두냐가 보였던 모양이다. 소냐가 읽어 주었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소냐에게 살인 사실을 고백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행위는 ‘죄’가 아니라 ‘초인’이 되려는 실험이라고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서 아벨을 죽이고도 뻔뻔하게 변명하는 가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소냐가 그를 설득한다. “회개하세요. 뉘우침이 있는 곳에 영혼의 햇살이 비치니.” 그녀의 말대로 그는 더럽혀진 대지 위에 입 맞추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크게 외친다. 뉘우침과 함께 7년간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난 그는 오랜 범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사람을 살인하고도 감추는 자는 영혼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을 말하려 했다. 작가는 ‘죄’를 짓고 자백하지 않는 자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벌’이 주어지므로 차라리 회개하고 형벌을 받아 영혼이 치유되는 길을 선택하라고 권면한다. 살인 후 사람들이 자신을 살인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강박증에 식은땀을 흘리며 불면의 밤을 보낸 라스콜니코프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소냐라는 창녀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자본주의 병폐를 대변하고 있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치유할 수 없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그가 고통받게 된 살인의 죄의식은 순수한 내면을 지닌 소냐의 도움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우리 주변에 살인 소식이 범람하고 있다. 가난을 이기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기 몸을 파는 창녀 카튜샤와 소냐가 부호 네플류도프와 지식인 라스콜니코프를 회개의 길로 안내한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 사회의 부조리와 악에 분노하며 살인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답변부터 찾아야 할 듯하다. 살인의 출발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증오와 분노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냐가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순수한 영혼을 간직했던 것과 달리 지식인 라스콜니코프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채 타인을 향한 증오를 불태우기 위해 살인을 감행했다.

살인 후 죽음의 공포에서 두려워 떨던 라스콜니코프가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죽지 않은 양심이 그를 소냐에게 인도해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인은 증오를 해결할 수 없고 사회문제를 풀 수 있는 방도가 될 수도 없다.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이들은 참회의 기회를 얻지 못할 때가 많다.

오늘 한국의 살인사건 범죄자들 내면에서 양심의 소리가 잠들어 버리고 뉘우침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들의 양심이 다시 살아나고 살인을 멈추도록 다시금 소냐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된다. “회개하세요. 뉘우침이 있는 곳에 영혼의 햇살이 비치니.”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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