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저널=이성진 기자] 법이란 무엇일까? 표준국어사전에서는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으로서 국가 및 공공 기관이 제정한 법률, 명령, 규칙, 조례 따위라고 정의한다. 국가 또는 공공 기관이라는 공적 권한을 가진 제정 주체가 국가, 사회라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합의 내용을 지키라며 강제하는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법 제정권자가 누구냐에 따라,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또 위법에 대한 제재 강도를 어느 정도로 하느냐 등에 따라 법은 물 흐르듯 한 정법(正法)이 되느냐 또는 시대를 거스르는 악법(惡法)이 되느냐, 그 경계선을 오간다. 국가의 탄생과 소멸은 법과 떼래야 뗄 수 없고 사회의 발전은 정법과 악법의 대립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 제정권력을 누가 갖느냐가 권력투쟁의 역사라면, 법이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시민항쟁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강제력을 수반한다는 것 또한 법이 일반적 사회적 약속이나 사회 상규와 다른 특징이다. 강제력의 강약 또한 사회 일반의 규범적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지나친 강제력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그 반대이면 규범력을 상실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악법도 법일까’라는 명제는 의미가 크다. 법 만능주의는 자칫 법실증주의에, 법 억제주의는 자칫 원님재판(행정)의 부작용에 빠져 들 수 있다.
미국 지인파를 통해 ‘미국 사회는 법 만능주의’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긍정적으로는 다양한 사회성을 순환시키기 위해, 거대 사회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거세지는 인권의식 등을 포용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기제에 강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부정적으로는 인간미가 없는 삭막한 사회를 불러 온다는 것이다. 특히 ‘눈 내리는 날이면, 미국 변호사들은 더 많은 이들이 낙상하길 기도한다’는 얘기를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법과 개인, 법과 사회, 법과 국가 관계를 이해하고 관통할 수 있어야 그 공동체는 건실한 유기체로 성장할 수 있듯이, 이러한 관계구성을 학습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기초가 탄탄하기 마련이다.
반세기 이상 유지됐던 법과대학, 사법시험, 사법연수원이라는 법조인력양성시스템이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로 전환되면서 특히 법철학, 법사상사, 법사회학 등 기초법학이 우리 사회에서 고사(枯死)하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연간 1만명의 법학도들이 4년 과정의 법과대학 체제하에서 다소 느긋한 여유를 갖고 접할 수 있었던 기초법학이 2천명 중심의 3년제 로스쿨 체제로 전환하면서 외면을 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무가 양성에만 치우친 로스쿨 교육과 변호사시험 준비 부담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관심 부족으로 기초법학 교육이 부실해지고 연구자 양성도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법률가들의 무관심과 실용법학 우대 정책으로 인해 기초법학은 교수, 학생들로부터 의미없는 학문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현실 진단이다.
로스쿨에 대해 ‘오히려 법 친환경, 사회 저변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아닌가’라며 기자는 종종 의문을 품는다. 소수 정예 인원만 그 전권을 독식하는 구조로 전락하고 있는 현 법학교육 시스템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기초법학마저 고사하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기초법학 및 이론법학은 법 원리를 살피고, 어떻게 법을 이해하며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학계뿐만 아니라 실무에도 중요한 이론적 위치를 지닌 만큼 결코 방기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지난 7일 한국법학원과 기초법학관련 학회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기초법학 진흥을 위한 토론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들은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법의 타락’에의 저항... 기초법학의 역할은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았던 한 아테네 시민이 자처했던 등에의 역할... 등에가 필요한 까닭은 법은 권력과 마찬가지로 늘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
대한민국에도 등에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기초법학을 익히는 인재들이 가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