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앱이 활성화 돼 가장 크게 변화된 것은 무엇일까. 주문해 놓고 마냥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닐지. 주문 완료 즉시 도착 예정 시간도 뜬다. 자장면 배달해 놓고 속 타던 기억이 있다. 전화하면 ‘막 출발했다’고 하는데 실제 도착한 시간 보면 전화 받고 그제야 주문을 넣었을 것 같은 강한 의심이 든다. 맛 집 앞에서 줄 서고 있을 때도 주인은 금방 자리 난다고 안심시키지만 형식적인 멘트다. 자주 늦는 친구도 약속 시간 막 지나면 전화해서 ‘거의 도착했어’ 한다.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는 지각 사유면 뭐라고 할까. 이런 지각은 애교고 고의적으로 시간 끄는 몰염치한 족속이 있다.
납기를 지켜야 하는 건 직장인의 숙명이다. 보고서도 데드라인이 있고 기사송부도 마감시한이 있다. 어떤 은행은 신속성을 주기적으로 테스트한다. 감정평가법인에 탁상 자문을 요청하고 회신이 도착하는 시간을 잰다. 법인별로 평점을 주고 평가에 반영할 목적이다. 제 때 그리고 늦지 않게 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걸 나무랄 수는 없다. 늘 그 쪽이 준비돼 있다는 표시로 받아들이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토지보상법은 절차법이다. 공익사업을 수행하는 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절차를 규율한다. 보상의 핵심은 보상금이고 그걸 감정평가사가 결정한다. 가격이 나와야 협의도 하고 그 이후 수용절차까지 쭉 진행될 것이다. 보상평가에서 가격끼리 부딪히고 수렴구간을 벗어나면 재평가를 진행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 3기 신도시 과천지구에서 가격 수렴이 안 돼 재평가에 돌입한다는 기사를 봤다. 그건 절차법에 나와 있는 대로 가면 된다. 그런데 가격을 안 내면, 보고서를 안 보내면 다음 절차 진행이 꼬여 버린다. 그걸 알고 후속 절차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고의로 시간을 끄는 추태가 있다고 들었다.
한 공익사업의 추태는 이렇다. 이 지구는 물건 등이 거의 없고 토지는 30여 필지에 불과하다. 협의보상 평가 의뢰한 날로부터 납품 시기는 약 40일 정도다. 사업시행자 일정이 급하면 2주 정도에 끝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업무량이다. 그런데 40일을 다 채울 시점, 공문 한 장 떡하니 사업시행자에 띄운다. 특정 필지 현황 측량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제시받은 공부상 지목과 현실 이용 상황이 다르다는 이유다. 공문에는 토지보상법 시행규칙 부칙 내용이 담겨 있다. ‘불법형질변경토지 등에 관한 경과조치’로, ‘1995년 1월 7일 당시 공익사업시행지구에 편입된 불법형질변경토지 또는 무허가개간토지에 대하여는 제24조 또는 제27조제1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이를 현실적인 이용 상황에 따라 보상하거나 개간비를 보상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불법형질변경토지에 대한 경과조치는 ‘불법이지만 일단 용인해 주겠다’는 취지였다. 이용 상황에 대한 다툼은 곧 보상금에 대한 다툼이다. 평가대상이 달라지고 가격도 달라진다. 따라서 공문 내용은 합리적인 문제 제기다. 그런데 ‘95년 1월 7일 당시 공익사업시행지구에 편입’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툼이 있을 수 있다. 도시계획시설의 결정고시만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사업시행의 후속 조치로 인가고시 등의 절차까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도시계획시설 간에도 성격이 다르다. 구체적인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지정과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지정이 있다. 도로는 개설을 목적으로 하지만 공원은 보존을 목적으로 한다. 전자는 협의에 의한 취득과 수용이 예정된 반면 후자는 그냥 그 상태대로 보존하기를 원해서 지정한다.
불법형질변경 된 토지의 이용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예민한 문제다. 감정평가사를 구속하는 ‘감정평가실무기준’에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규정이 있다. ‘토지 보상평가의 대상은 공익사업의 시행으로 인하여 취득할 토지로서 사업시행자가 보상평가를 목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대상토지의 현실적인 이용 상황 및 면적 등은 사업시행자가 제시한 내용에 따르되 실지조사 결과 제시목록상의 이용 상황과 현실적인 이용 상황이 다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등은 사업시행자에게 그 내용을 조회한 후 목록을 다시 제시받아 감정평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수정된 목록의 제시가 없을 때에는 당초 제시목록을 기준으로 감정평가 하되, 감정평가서에 현실적인 이용 상황을 기준으로 한 단위면적당 가액 또는 면적을 따로 기재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감정평가사는 사업시행자에게 ‘그 쪽은 지목대로 임야로 평가해 달라고 했는데 실제 와서 보니 오랫동안 밭으로 쓰고 있으니, 임야인지 밭인지 판단해 주세요.’ 요청해야 한다. 사업시행자는 임야로 보상해 주고 싶고 토지소유자는 경과조치를 적용받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목록 결정 권한은 사업시행자에게 있다. 감정평가사는 중립적 위치에 있다. 이용 상황 정정 요구에도 사업시행자가 묵묵부답이라면 현장 조사자의 책무를 저버려서도 안 된다. 그 내용을 기재하고 보상금을 적는 란에 ‘밭으로 봤을 때의 가격은 얼마’라고 임야가격과 함께 병기하면 된다. 그게 감정평가실무기준의 내용이다.
앞에서 고의적으로 시간 끄는 몰염치한 족속 얘기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밭으로 이용 상황을 바꿔주지 않으면 직업 양심 상 평가서를 못 냅니다.’면서 버티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밭’이 아니라 ‘임야’가 맞았다면 어쩔 것인지. 평가자는 그 상황에 맞는 가격을 제시해서 둘 사이의 협의절차가 진행되게 도움 주는 조력자에 불과하다. 한 달 여 보상평가액을 두고 다른 평가자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자 납기 즈음에 현황측량이라는 카드를 내밀며 지연 전략을 쓰는 추태가 볼썽사납다. 애초에 사업 지연 전략을 구사할 생각이 없었으면 그런 공문은 일찍 시행했어야 하고 또 만족스런 답변이 없으면 규정대로 처리했어야 할 것을. 씁쓸한 현실이다.
이용훈 감정평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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