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감정평가사
간편식에 길들여지면 제대로 차려진 식탁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다. 꽤나 많은 수고가 곁들여진 상차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때 되면 뚝딱 차려진 것 같은 매 끼 식사도 부엌에서의 종종걸음이 낳은 결과물임을 알기나 알까. 우유에 타 먹는 곡물 가공품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패다. 세간의 화제프로그램 중 하나는 남정네들이 하루 세끼 잘 먹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만을 담고도 그렇게 인기가 많다. 출연진의 입담, 제작진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소박한 밥상 차림 체험기에 실려 대중의 이목을 끌 줄 누가 알았을까. 다음 끼니가 6시간이면 도래하는 것과 달리, 주문에서 배송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인지 인기차종인지 여부를 출고 대기기간으로 가늠하기도 한다. 이 때 대기기간을 양으로 환산하면 주문적체량이 된다. 조선업계에서는 업황의 성쇠를 바로 이 수주잔량의 추세로 판단하고 있다. 수백에서 수 천 톤 선박의 제작기간이 최소 몇 달은 소요되니 주문이 쇄도하면 잔량수치는 급격하게 불어나게 된다. 그래도 일거리가 많아 비명을 지르는 게 행복한 일일게다.
2013년까지 한국은 조선업계 정상에 있었다. 그러나 2014년 들어 중국에 밀리고 특정 월은 일본에도 수주 실적이 밀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최근 유가하락 추세에 급유단가 절감으로 청신호가 켜졌다고 하지만, 2015년도에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기사가 업황개선 리포트를 압도한다. 수주잔량과 함께 조선업계 살림살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지표가 있다. BDI지수다. 발틱 해운거래소가 발표하는 해운운임지수로 철광석ㆍ석탄ㆍ곡물 등 원자재를 실어 나르는 벌크선 시황을 나타내며, 세계 26개 주요 항로의 배 유형별 벌크화물 운임과 용선료 등을 종합해서 1985년 1월 4일 1,000포인트를 기준으로 선형별로 대표항로를 선정하고 각 항로별 톤·마일 비중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해 산정한다. 얼마 전 BDI지수가 3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고 한다. 상품가격 하락과 선박 과잉 공급이 주원인으로 지목됐으니 반등 기미로 볼 수 있는 ‘접안 대기일수가 늘어났다’는 기사라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시장이 이렇게 맥을 못 추니 자연스레 선박 값도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선박의 분류 기준은 여러 개다. 기선과 범선은 동력의 종류에 따른 분류다. 전자는 ‘기관’의 추진력을, 후자는 돛을 이용한 바람이 동력원이다. 용도에 따라서는 상선, 어선, 군함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선체재질로는 목선, 철선, 강선 등의 세분화가 가능하다. 디젤선, 가스터빈선, 원자력선은 추진 기관을 분류 기준으로 삼는다. 이런 분류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수 백 억에서 수 천 억, 수조까지 이르는 제작비용을 기준으로 한 서열 정하기다. 하위에는 해상물류선인 벌크선, 자동차 운반선, 컨테이너선이 자리 잡고 있으며, 중위권에는 유조선, LNG선, 원유시추탐사선이 위치한다. 제우스가 그 딸 아테나에게 선물한 방패를 뜻하는 ‘이지스함’, 축구장 2~3개 길이에 15m 이상의 선고를 자랑하는 선상 호텔 ‘크루즈’선, 해상의 정유공장인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loating production storage and offloading unit)는 제작비용 단위를 ‘억’에서 ‘조’로 격상시켰다.
토지와 건물, 구분소유부동산, 입목, 일부 동산 등이 그 소유권과 재원을 기재한 공적 장부인 등기사항전부증명서와 유형별 대장을 갖고 있듯, 선박을 위해서도 이런저런 관련서류가 구비돼 있다. 총톤수 20톤 이상의 선박 국적을 확인해 주는 증서인 ‘선박국적증서’, 선박의 재원을 담고 있는 ‘선박원부’, 정기검사 합격 증명서, 해운검사수첩, 국제톤수증서 등이 그것이다. 토지는 입지, 건물 등 상각자산은 재조달원가가 그 가치를 판단함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데 선박은 재원이 비슷해도 제조국에 따른 가격 격차가 있다. 품질의 차이 외에도 정기적인 검사와 수리의 용이성이 미치는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 한편, 선박의 규모 단위는 선박 용도에 따라 맞춤형이다. 선체의 무게라면 G/T(Gross Tonnage), 안전 화물 적재량을 지칭할 경우 DWT(Dead Weight Tonnage), 컨테이너 운반선에는 규격화된 수량 단위 TEU(Twenty-Feet-Equivalent Unit)가 쓰인다. 1000TEU급의 선박이라면 길이 약 20m의 컨테이너 1000개를 싣고 운반할 수 있는 컨테이너선박을 지칭한다.
선체, 기관, 의장은 선박 공통의 재원 항목이다. 선체는 선박의 몸체, 기관은 선박의 동력체를 가리킨다. 항해기기, 하역장치, 구명설비, 소방 설비, 통신설비 등의 의장은 선박의 성능 발현과 관련된 내부 장기로 선박 몸값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선박 종류별로 부대설비를 포함한 재원이 특화돼 있다. 소형 어선이라도 음파탐지기를 장착하지 않았다면 요즘 같은 시절 어군을 어떤 식으로 추적할 것인가. 그저 막막하다. 유조선은 기름 유출 방지를 위해 선체를 두 겹으로 싼다. 뼈대인 철판 값이 만만치 않다. LNG선은 액화천연가스 운송을 위해 고압, 저온에 견디는 특수구조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 겨울철 차디찬 양철 도시락과 보온 도시락의 격차는 상당하다. 제작 단가에 직접 반영될 부분이다. 이지스함에 들어가는 각종 첨단 장비는 돈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다. 단 한 번의 포격에도 노출되지 않는 대가로 그 정도 비용은 감수해야 하지 않는가. 일반 군함과의 가격 차이는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선박의 가치를 추계하기 위해 비용접근법과 시장접근법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다. 제작비용과 최근 시장에서의 인도 및 매매가격으로 가늠하는 것이다. 「감정평가에 관한 규칙」20조는 선박 평가의 기준을 담고 있다. ‘선박을 감정평가 할 때에 선체, 기관, 의장별로 구분하여 감정평가 하되, 각각 원가법을 적용하여야 한다’고 해 원칙은 구성 요소별 원가법이다. ‘감정평가실무기준’은 좀 더 자세히 풀었다. 비용접근법에 의할 때 선체는 총톤수, 기관은 엔진출력을 기준으로 감정평가하며, 초기 가치하락이 많이 발생하는 정률법에 의한 감가수정을 하되, 사용정도 및 관리상태 그리고 수리여부 등을 고려하여 실제경과연수를 증감할 수 있는 관찰감가를 병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선박의 경제적 사용연한과 내용연수 만료 시 잔존가치비율은 「수산업법」시행령 제69조에 따른 [별표4]를 적용한다. 선박으로서 효용가치가 없는 것은 해체처분가격으로 감정평가 하도록 한 것은, 폐선박은 고물상에 파는 철근가격 이상으로 받을 수 없다는 상식에 기초한다.
요즘 인터넷에 선박 중개 사이트가 적잖다. 매물을 주기적으로 올리고 방매가격도 게시한다. 중고 어선은 물량이 충분해 대강의 검색으로 가격 수준 파악이 가능하다. 최근 매매가 된 사례를 포착할 수 있는 평범한 종류의 선박이라면 시장접근법인 거래사례비교법을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자세한 거래내역 확보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며, 격차 보정에 대한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정기검사를 앞두고 있어 조만간 접안해 도크로 올려 질 선박이라면 최근 정기검사를 마친 우리 선박에 비해 열세한 정도를 정기검사비용으로 추산할 것이고, 검사 비용 수준에 대한 식견이 필수적이다. 매매시점 격차를 보정하기 위해 BDI지수 등 각종 지표 또한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중고선박 가격이 1년 내 50% 가까이 뛰거나 곤두박질할 경우 연 초와 연 말 화물운임지수의 급등 혹은 급락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활황기나 불황기 선박 가격이 요동칠 때는 비용접근법에 의한 결과가 신빙성이 떨어지고 거래사례 분석이 신뢰감을 준다.
1일 용선료 역시 호텔 하루 숙박료와 방불해, 수익성 부동산의 임대료를 가치로 전환시키는 논리에 따라, 화물선의 가격 수준을 역 추적할 수 있는 자료로 쓸 만하다. 다만, 참고자료로서 유용한 데이터다. 감정평가사라도 선박중개상만큼 배에 대한 가격감을 갖기는 불가능하다. 톤 당 신조단가, 중개 사이트에 게시된 매물 정보 등을 훑어보며 가격대를 가늠하고 정해진 산식에 대입해 얻은 결과물을 한참을 이리저리 고민해 봐야 뒤늦게 감이 올라온다. 자신 없을 때는 철저한 탐문조사만이 살 길이다. 취재 기자가 반복되는 전문가 공식 인터뷰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준전문가의 반열에 오르듯, 선박과 같은 특수자산도 감정평가사에게 많은 공부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