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43 / 자산의 생명줄 길이, ‘내용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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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 산책 43 / 자산의 생명줄 길이, ‘내용연수’
  • 이용훈
  • 승인 2014.05.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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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감정평가사

EBS에서 매주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고정 방송되는 ‘세계테마기행’은 필자처럼 앉아서 편히 관광하기 원하는 이에겐 가뭄 끝 단비 같은 존재다. 오가는 시간 낭비 없이, 도보의 피곤함과 장시간 기내 좌석의 불편함을 싹 날려주는 무일푼 공짜여행이지 않은가. 혹자는 이런 간접여행에서 현장감만큼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LCD패널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필자 같은 이에겐 예외이지 싶다. 여행자가 중세 유럽의 유려함을 고스란히 담은 마을을 걸을 때면 의문 한 가지가 지체치 않고 튀어나온다. ‘건물 수명이 저렇게 길수 있을까?’. 수 백 년 장수한 고목은 생물이니 그렇다 해도, 풍찬노숙의 세월, 나무 혹은 돌덩어리 구조물의 생명줄이 세기를 뛰어넘을 수 있음은, 자재의 강도로 설명해야 할까 아니면 건축자의 능력으로 돌려야 할까. 어쨌든 자산의 수명, 곧 ‘내용연수’의 문제는 고색창연함을 느끼는 것 이상의 논의거리다. 중고자산의 가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유형 자산이 영업활동에 사용될 수 있는 예상기간을 ‘내용연수’라 부른다. 사용불가 처분을 받아 폐기될 때까지의 자산의 수명, 곧 생명줄의 길이와 동의어다. 주택은 신축시점부터 거주가 불가능할 때까지, 공장은 제조활동이 가능한 연한, 근린생활시설이라면 판매 공간의 역할을 다할 때까지가 각각 내용연수가 된다. 생명줄에 대한 논의는 시간이 갈수록 마모, 마멸되는 소위 상각자산에만 유의미하다. 토지는 늙고 퇴화되는 문제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시골 폐·공가를 떠올리면, 온통 거미줄 쳐 있는 와중에도 건물의 상태는 허물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대로 놔두면 거뜬히 수 십 년은 더 존속할 수 있다. ‘언제까지 형체를 유지할까’로 재단할 경우 이를 ‘물리적 내용연수’라고 부르고 ‘언제까지 기능을 유지할까’로 바라보면 ‘경제적 내용연수’가 된다. 세법에서든 감정평가에서든 전자가 아닌 후자를 기준으로 내용연수를 논한다. 타이어의 고속주행실험을 통해 안전주행거리를 측정하는 낯익은 광경을 떠올려보자. 어떤 자산은 기간이 아닌 주행거리, 생산량 등의 요소로 수명 측정을 한다. 결국 내용연수는 식품의 유통기한과 같이 제 기능을 발현할 수 있는, 물건의 최대 수명인 셈.

회계처리를 할 때 자산의 내용연수를 정해야 하는 건 ‘비용과 편익의 대응기간’을 정하기 위해서다. 공장을 신축한 상황을 상정해 보자. 준공이 떨어지면 이 건물은 기업의 자산대장에 이름을 올린다. 물론 자산대장에 기재한 건물의 가치만큼 이 기업은 공사비용을 지출했다. 그런데 기간이 경과하면 신축건물은 중고자산이 되고 내용연수가 다하면 철거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줄곧 생산라인을 담는 그릇으로, 수익을 올리는 데 기여해 왔던 부분을 어떻게든 고려해야 마땅하다. 이 건물이 수명을 다해 전혀 가치가 없게 될 때 한 번에 장부가를 ‘0’으로 조정하기보다는 수익에 기여하고 있는 팔팔한 기간 동안 취득비용을 매년의 감가상각비로 안분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비용과 편익의 대응이다. 그리고 대응을 시키는 기간, 자산의 수명이 곧 ‘내용연수’가 된다.

감정평가에서도 상각자산의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내용연수를 확정해야 한다. 다만, 이 기간 회계처리와 같이 취득비용을 안분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의 가치하락의 정도를 ‘감가수정’ 하는 것이 다르다. 매년 노후화의 정도가 비슷해 가치하락이 직선적이라면 10년이 경과한 건물의 현재 가치는 내용연수를 얼마나 책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용연수 종료 시 몸값이 ‘0’이 된다면, 내용연수를 40년으로 잡을 때는 75%의 잔존가치, 50년으로 설정하면 80%의 잔존가치가 추계된다. 결국 중고 상각자산의 실제 가치를 확정하기 위해 그 자산의 내용연수, 생명줄의 길이를 재는 일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내용연수를 정할 수 있을까. 재료공학에서는 구조물의 ‘피로도(fatigue)실험’을 통해 수명을 추정한다. 구조물이 받는 압력, 충격, 진동, 소음을 반복적으로 가해 얼마의 횟수 만에 균열 혹은 파괴가 이뤄지는지 보는 것이다. 파괴가 있기까지의 횟수를 매년 혹은 매월 실제 가해지는 충격횟수 등으로 나누면 내용연수가 도출된다. 화학전지는 고온에 일정기간 노출시킨 후 식혀 상온에서 성능테스트를 거친다. 고온에서의 하루 보관은 상온에서 수 십 일 혹은 몇 달 유지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에 수 십 년 혹은 수 백 년이 지난 후 어떤 상태인지 앞당겨 측정해 볼 수 있다. 성능곡선이 존속기간의 기준으로 삼은 하한선에 도달하는 고온에서의 노출 기간에, 상온과 고온을 대응시키는 기간배수를 곱하면 상온에서의 내용연수가 튀어 나온다.

여러 다른 분야에서 내용연수를 정하는 이런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하면, 감정평가에서는 가격에 대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게 수순처럼 보인다. 중고자산의 가격이 연령에 따라 어떻게 변동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곧 매년 신품을 기준으로 몇 % 가치가 하락하는지, 매년의 감가상각 율을 추정하는 것과 동일한 작업이다. 그러나 자료 수집이 일부 자산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레몬효과처럼 잠재적 구매자들은 예상치 못한 썩은 레몬을 생각하고 실제 시장가치보다 낮게 구매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하향 평준화된 처분 가격 데이터로 실제보다 짧은 내용연수를 얻게 된다. 처분 당시 인플레이션 등의 경기 변동에 따른 가격 조정이 발생했다면 이런 효과를 콕 집어 발라내는 것도 쉽지 않다. 개개 자산의 품질의 차이 혹은 사용관행의 차이를 생각하면 특정 자산 군(群)에 대해 동일한 내용연수를 적용해야 하는가도 의문이다.

이런저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현재 거의 모든 유형의 상각자산에 대한 내용연수표가 작성돼 있다. 구조, 자재, 용도가 동일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건 내용연수는 동일할까. 그렇지 않다. 동일한 주택이라도 미국은 7~80년, 우리는 50년, 일본은 30년 이하의 내용연수를 적용하고 있으니. 일본의 지진, 태풍의 영향을 생각하면 일본이 여타 국가에 비해 주택 내용연수를 짧게 잡은 이유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7~80년대 비해 건물 내용연수가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공법, 시공의 질, 자재 등 주택의 품질이 상향된 결과일 것이다. 또한 기계류, 소프트웨어, 통신장비, 운수장비, 구축물 등의 내용연수를 들춰보면 대충 그 정도 기간 사용할만하다고 고개는 끄덕여진다. 다만, 그 도출과정에 전적으로 가격정보를 활용했을까 의문은 든다. 댐이나 공항시설, 철도, 원자력발전소 등 특수자산은 계량뿐 아니라 비계량적 요소를 고려해 그 수명을 정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정책적 판단이 녹아 들어갔을 것이다.

자산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없음도 주지해야 한다. 구도심 시장 통 허름한 상가마다 간판과 전면 인테리어는 화려하다. 이런 치장만으로 중고건물 생명줄은 늘어나지 않는다. 외관 개선보다는 뼈대를 보강하느냐가 수명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세월호처럼 과적 목적의 불법증축은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두 차례 안전진단을 거치는 수직증축 리모델링 아파트도 안전 진단 통과가 곧 신규 재건축아파트와 같은 내용연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 가동 중단 때마다 재가동 반대와 폐기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수명이 다했다는 지적인 것이다. 한 나라 전체의 자본스톡, 국부와도 관련된 내용연수는 상각자산이 기능, 작동, 가동, 존속할 수 있는 가장 적정한 생명 연한이다. 도출하든, 추정하든, 설정하든 합리적인 기준으로 정해야 중고자산의 몸값은 제값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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