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안녕하세요, 박근혜 대통령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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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안녕하세요, 박근혜 대통령님(9)
  • 법률저널
  • 승인 2013.11.22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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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안녕하세요 박근혜 대통령님. 서울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모양이더군요. 날씨가 추워지면 마음마저 추워지기 쉬운데,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이 따뜻한 겨울이기를 기도합니다. 외국에 나오면 애국자가 저절로 된다는 말이 절절합니다. 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독감예방주사라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독감예방주사 수요에 대한 예측이 잘못되어 보유량부족으로 애 먹는다는 말이 들려오기도 해서 왜 해마다 연례적 준비를 저리 소홀히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필자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 동네 의사 분의 추천으로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왔습니다. 독감예방주사가 절대예방책은 아니겠지만,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안도감이 올 겨울 감기를 이길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카고에서의 세 번째 주간, 곳곳에 펼쳐지는 넓고 푸른 공원을 거니는 수많은 시카고 시민들을 보면서 필자도 덩달아 시카고의 평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간혹 총기사고가 나서 사람을 혼란스럽게도 하는 도시이지만, 전반적으로 시민들이 넓은 공원이 주는 평화를 함께 향유하며 사는구나 싶어 너무 많이 부럽습니다. 거의 하루 내내 수많은 시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개를 끌고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산책을 위해 사람이 나온 것인지, 사람산책을 위해 개가 끌려나온 것인지 혼자 궁금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여튼 개와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은 아주 흔한 풍경입니다. 아파트들이 들어선 다운타운 공원에서 개와 함께 하는 사람은 모두 아파트 주민들이겠지요. 평생 처음 보는 신기한 종의 개를 여럿 보다가 문득 깨달은 것은 어떤 개도 처음 보는 낯선 필자를 향해 짓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 안타깝게도 개의 생명인 성대를 모두 잘라버렸다는 사실을 순간 깨달았습니다. 서울 등 아파트에서도 성대수술을 한 짖지 않는 개와 함께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시카고 개들은 하나 같이 모두 성대수술을 해 짖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시카고 개들은 성대가 잘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슬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린 시절 집에서 똥개(?)를 한 마리 키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세상모르고 진돗개라고 친구들에게 우겨도 봤지만, 똥개는 똥개일 뿐이었습니다. 필자는 중학교 다니던 작은 형이 그 개를 “도그, 도그”이라고 불러서 개이름이 “도그”인 줄 알고 나도 “도그, 도그”라고 불렀는데, 6학년 때쯤 형으로부터 영어를 처음 배우며 독이 그냥 개의 일반명사이고, 도그라는 발음이 Dog의 일본식 발음인 것을 뒤늦게 알았지요. 그렇게 Dog를 도그라고 발음한 덕에 시카고 생활 중 영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태까지 의사소통이 안 된 적이 없었으니, 그것도 나름 신기한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시카고의 짖지 않는 개들은 제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과 더불어 사람이 사는 집에서, 사람이 주는 개밥을 먹으며 순종하며 사는 덕에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짖는 법을 잊고 사는 시카고의 잘 생기고 멋지고 세련된 개들을 보면서, 똥개라며 동네 형들에게 간혹 발길질을 당했을망정 낯선 이가 골목길만 들어서면 “왕왕” 짖어대며 위용을 과시하던 도그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밤새 도그가 짖어대던 그 다음 날 아침, 바로 옆집 두 집에 도둑이 들었다며 동네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우리 집은 도둑을 맞지 않았음을 알게 된 아버지께서 도그 덕에 도둑맞지 않은 것 같다며 도그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개는 그렇게 짖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이겠지요. 도둑을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대한민국 정가의 말싸움들을 보면서 문득 시카고의 사랑스런 애완견과 필자의 어린 시절 도그가 함께 떠올랐습니다.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않아야 할 때, 말을 할 때에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시끄러움은 열에 아홉은 말실수 또는 말장난에서 비롯되고 있구나 하는 판단을 내리게도 되었습니다. 서로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상대방의 말 한 마디를 꼬투리 삼아 정치적 우위를 점해보려는 노력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멀리서 보면 다 보입니다. 최근 김무성 의원의 “지난 대선에서의 남북정상회담회의록 내용을 찌라시를 보고 확신하게 되어 선거유세에 발표하게 되었다.”라는 변명은 사람 배꼽 뽑는 말의 압권인 듯합니다. 그리고 민주당 강기정 의원이 청와대 경호실 차량에 발길질을 했다는 것도 분별없는 행동의 압권인 듯합니다. 왜들 그리도 분별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인지, 정말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시켜 교육을 새롭게 시켜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낯선 타인이면서도 철저하게 예의를 갖추는 미국인들, 문을 열 때는 뒤에 오는 사람을 배려하며 문을 잡고 기다려 모습이라든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기 위해 엘리베이터의 문에 손을 내밀어 기다려주는 모습이라든지, 모든 것이 생소하면서도 낯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생활습관으로 익힌 그들의 모습에서 공동체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박 대통령께서 국회시정연설을 멋지게 하셨더군요. 20여분의 연설 도중 새누리당의원들에 의해 35회의 박수가 이루어졌다니, 그들이 얼마나 연설내용에 감동을 받았으면 그랬을까요. 그러나 새누리당의원들만의 박수에서 문득 시카고의 짖지 않는 개들이 연상되었다면 내 생각이 불경스러운 것일까요? 박수를 전혀 치지 않았다는 민주당의원들의 모습에서 필자의 어린 시절 짖어대던 도그를 연상했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한 생각일까요? 연설은 우군에 대한 협력을 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군(?)으로부터의 감동을 받아내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박 대통령께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이미 들을 귀를 닫아버린 상대방의 마음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문을 먼저 열도록 하는 것이 우선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겠지요. 그래서 공감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론상으로야 행정부와 국회가 삼권분립의 원칙으로 분리되어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어가는 것이 맞지요. 그렇지만 대통령은 행정가이기 전에 정치가이고, 또한 여당인 새누리당의 중요당원이므로 야당이나 국민은 대통령을 여당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외적 국제정치에서는 대한민국의 대표자로서 국가를 대표하여야겠지만, 국내정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당의 내부의견 수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회의 구성원인 여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의견개진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국회에 맡겨 놓고, 많은 국민들은 여당을 자율적 의사결정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국회가 결정해 오면 이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말로는 참으로 좋은 말이지만, 실재로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없기에 좋은 말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겠지요. 대통령의 적극적인 의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야당이나 국민에게 대통령의 직접적 의사가 아닌 국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물론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만)는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책임회피, 시간연장책일 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사이로 국정원 직원들에 의한 트위터글 110만 건이 새롭게 발견되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공소장변경이 2차로 신청될 것이라는 보도를 전해 듣습니다.

어제는 지인이 보내준 가수 나훈아씨의 “空”이라는 공연실황 유트브 동영상을 보았지요.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고 싶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미련하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이미 늦어도/ 그런 대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리는 세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가사를 받아 적느라 다섯 번을 반복해서 들었네요, 그 덕에 노랫말에 아주 공감이 되었답니다). 어둠이 짙어지는 낯선 도시 시카고, 높은 건물들의 조명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듣게 된 “공”이라는 나훈아의 노래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박 대통령께서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당대에 완성시키고자 서둘렀던 염원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으면 합니다. 어느 철학자가 그랬죠, 어리석은 인간이 무한한 세월을 쪼개 유한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시간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고요.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이 “당대에 내가 이룬 것”이라는 망상이지요. 시간은 세월 속에서 영원한 것이고, 내가 이룬 것은 창세 이래 역사 속에서 진짜 찰라 아니겠어요? 신께 대적하고자 세웠다는 바벨탑이 왜 무너졌을까요? 우리가 당대에 세우는 것은 모두 바벨탑입니다. 당대에 기록된 역사는 후대에 의해 산산이 찢기고 부서지지요. 당대의 역사는 모두 바벨탑이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누가 후대를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당대는 당대로 끝내는 자가 현명한 자가 아닐까요? 당대만을 생각하는 박 대통령이었으면 합니다. 당대? 그것은 그냥 잘 하는 것이지요. 그냥 잘 하는 것......

대통합의 길은 나훈아가 절창하는 “비움”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백년도 힘든 인생이 천년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박 대통령께서는 “남은 4년만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될 뿐 “대한민국의 남은 유구한 역사를 책임”지려고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왜 필자의 눈에는 짖지 않는 시카고 개들이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개를 끌고 한가로이 산책하는 시카고 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처럼 난폭자로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녁, 붉은 와인 한 잔과 함께 조명불빛을 좀 낮추시고, 소파에 깊숙이 앉아 나훈아의 “공”을 한 번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시간이 되신다면 저처럼 한 번 다섯 번쯤 들으시며 가사를 음미해 보는 것도 참 좋을 듯 싶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들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필자도 여기에서 한 다섯 번 정도 더 듣지요. 인생 육십쯤 살다보면 이런 노래 한 번 깊이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라고요. 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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