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시사와 법’ (158)-과거사 소송
아버지에게는 형님 한 분이 계시는 줄 알았다. 불혹을 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아버지에게 형님 두 분이 더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두 분이 6·25 전쟁 전, 후에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민주화가 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혹시라도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말씀조차 꺼내지 않으신 것이다. 그 후 아버지는 본인이 생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를 찾아 진실규명 신청을 하셨다.
최근에 진화위에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두 분에 대한 ‘진실규명결정’ 통지가 왔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큰아버지 한 분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해에 좌익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법 감금되었다가 경찰에 의해 희생되셨고, 6·25 전쟁 이듬해 할아버지는 아들이 좌익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다른 큰아버지는 형이 좌익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각 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되었다가 희생되셨다고 한다. 당시 장례도 못 치르고 간신히 시신만 수습하여 가매장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 큰아버지들처럼 해방 전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군인이나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희생되었지만 그 가족들은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 두려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어디에 하소연도 못 하고, 가슴 속에만 묻고 지내야 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억울한 희생들이 있은지 무려 반세기가 지난 2005년에 와서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정리법)」이 제정되고,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상조사를 통하여 비로소 진실이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사정리법」은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에 관하여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아 희생자의 유족들은 또다시 개별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국가배상소송은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결정이 계속해서 나오면서 점차적으로 늘어갔다. 소위 ‘과거사 소송’이라는 불리는 소송에서는 국가의 항변 사유를 중심으로 여러 쟁점들이 있었다.
첫째, 사실인정과 관련한 문제다. ‘과거사 소송’의 원고들은 대부분 희생자들의 유족들로 과거사위원회에서 진실규명결정을 받고 그 결정문을 증거로 제출하여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묻고 있다. 대법원은 과거사위원회가 진실규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원에서 충분한 사실관계 규명 없이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서 신빙성 등에 대한 심사 없이 대상자 모두를 국가에 의한 희생자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과거사정리법에 정해진 권한과 업무 범위 내에서 사실조사를 하고 결정을 내린 이상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은 희생자인지 여부에 관한 유력한 증거자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라고 판시했다.
둘째, 소멸시효와 관련한 문제이다. 과거사 사건들은 대부분 6·25 전쟁 전, 후에 발생한 사건들로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기산점으로 보면 소멸시효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국가는 ‘과거사 소송’에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진실규명결정을 안 날로부터 단기소멸시효기간인 3년 내에는 권리를 행사해야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셋째, 지연손해금 관련한 문제이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는 이행을 구하는 별도의 최고가 없더라도 불법행위 성립과 동시에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위 과거사 사건들은 1950년 전, 후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은 불법행위시와 변론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손해배상액을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있다면 지연손해금은 사실심 변론종결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6·25 전쟁 당시의 민간인 희생사건 외에도 ‘혁명재판소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긴급조치위반 사건’, ‘프락치 강요 사건’ 등 그동안 감춰왔던 우리의 어두운 역사들이 진실을 찾아가고 있고, 그 과정에서 희생자의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되신 분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소송을 통해 묻고 있다. 굳이 소송을 통하지 않고 입법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었는지 아쉬움도 있지만, 소송과정에서 희생자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희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과거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종범 변호사/법무법인 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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