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민기, 위대한 뒷것을 추모하며

2024-08-02     최용성
최용성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이리 단순하면서도 깊은 뜻을 담은 아름다운 우리말 노래라니! 가사와 한 몸처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율의 아름다움은 마치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민요 같았다. 어느 대중가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음악이었다. 그렇게 김민기(金敏基, 1951년 3월 31일~2024년 7월 21일) 선생의 <상록수>를 처음 만났다. 충격이었다. 김민기가 부른 녹음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대입 종합반 학원의 수업시간에 젊은 역사 선생님이 재수생들에게 조악한 악보를 나눠주고 가르쳐준 노래였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기였으니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용감한 행동이었다. 물론 나는 김민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불온’한 노래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열심히 따라 불렀다. 대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던 상황에서 그렇게 김민기는 내 삶으로 다가왔다.

대학교에 들어온 뒤에는 ‘모범생’처럼 살았다. 김민기의 존재도 내게서 멀어졌고 안타깝게도 그의 예술에 대한 내 인식과 감성의 확장도 그때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처음으로 교내와 거리 시위에 동참하면서 비로소 헌법학 교과서를 통해 추상적으로 이해하던 민주주의가 진짜 무엇인지, 자유를 위한 투쟁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때 이후 김민기라는 이름 석 자가 다시 내 의식세계로 돌아왔다. 자유를 회복하려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마다 김민기의 노래가 있었고, 김민기라는 이름 자체가 자유를 빼앗기고 인권이 유린되는 현실에 저항하는 위대한 예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김민기의 예술세계는 더 깊고 넓다. 그의 노래는 우리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또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라는 심오하고 단순한 진리를 순수하고 아련한 서정적 아름다움 속에 담아내고 있어 시대를 넘는 감동을 준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김민기의 모습은 반쪽에 불과했다.

김민기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4월 21일부터 5월 5일에 걸쳐 SBS는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이동원·고혜린 연출. 4월 21일~5월 5일)를 방영하였다. 충격이었다. 김민기는 1991년 3월 15일 학전 소극장을 열었고 1994년 극단 학전을 창단해 한국 뮤지컬의 맥을 이어가며 엄청난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2004년부터는 “우리 모두의 미래는 어린이”라고 하면서 수익성이 전혀 없는 어린이 공연을 이어간다. 공연자들과 스탭들이 전혀 권리 보장을 받지 못하던 시절부터 김민기는 사재를 털어 그들을 먼저 챙기고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관람료로 어린이들이 부담없이 공연에 접근하도록 애썼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인데도, 앞것들이 스타가 되어 빛날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나 묵묵히 판을 깔고 돕는 뒷것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였다. 20대부터 오랜 기간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힘겹게 예술혼을 이어온 위대한 거장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뒤로 물러나 뒷것을 자처하는 이 놀라운 겸손함은 실로 경이롭다. 자신의 고난을 홀로 감당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는 그의 고귀한 삶에 존경과 고마움, 빚진 마음이 밀려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늘 앞것을 보고 열광한다. 가수, 독주자, 지휘자, 주연배우, 선수, 경영자, 고위공직자, 지휘관 등등이 영광을 독점한다. 그렇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앞것들을 빛나게 하는 수많은 뒷것들이 있다. 뒷것이 있어야 비로소 앞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과 서로 의존하며 이 험한 세상에서 버티며 살 수 있는 것. 뒷것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는 앞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앞것이 스스로 뒷것을 자처하며 수많은 앞것들을 빛나게 해줄 때 그 사람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

학전은 2024년 3월 15일 문을 닫았고 김민기도 하늘 위의 별이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앞것이자 뒷것으로서 김민기 선생의 이름은 그의 음악, 학전의 기억과 함께 영원히 남을 것이다. 편히 잠드소서, 불멸의 예술가여, 위대한 뒷것이여!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