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 흔드는 의원의 막말

2004-09-07     이상연
 

대법원이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판결을 내리자 정치권과 법조계를 중심으로 한 이 법 폐지론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일부 의원은 담당 대법관들을 수구․냉전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등 반발의 행태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 방송국의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국가보안법 폐지론자의 손을 들어주자 야당에선 “헌정을 수호해야할 대통령이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재와 대법원이 국보법 존속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에 대해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서는 등 보안법 존폐 및 개정 여부를 놓고 정치권뿐 아니라 국민 간 갈등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결의 시대적 의미를 떠나서 이 판결에 향한 일부 의원과 폐지론자들의 막말을 듣노라면 그들이 바로 자신의 말대로 구습을 벗지 못한 청산되어야 할 세력임을 스스로 방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대법원을 향해 “분단국가 성원으로서의 고뇌를 단 한 번도 한 적 없이 한평생 기득권에 취해 살아온 사람들” “이번 판결은 아직도 청산해야 될 낡은 수구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사건”이라고 막말을 해대는가 하면, 또 다른 의원은 “국보법 폐지 논의를 비판한 것은 사법 판단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정치 판결이자 냉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판결”이라며 냉전시대의 산물로 매도했다. 또 일부에서는 “대법원의 ‘인적 개혁’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 이라는 공공연한 협박까지 서슴없이 말하는 것을 보니 소름이 끼칠 정도다.


사법부를 향한 이들의 언동은 헌정의 기초를 뒤엎겠다는 대중 선동 정치가들의 쿠데타적 발상을 느끼게 한다. 이들이 쏟아낸 발언들을 보면 실망을 넘어 우리의 정치 수준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의원들은 법안의 처리와 관련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다. 건강한 토론을 거쳐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도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이 법의 개폐에 관해 얼마든지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 법원의 판결문까지 막말로 매도하는 식이어선 안 된다. 사법부의 법 해석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정치인들이 앞장서 판결문을 휴지 조각처럼 여긴다면 누가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려 하겠는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하는 의원이라면 이 법이 없이도 대한민국이 북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하고, 국민을 상대로 폐지의 필요성이 무엇이고, 폐지될 경우 어떤 보완책이 있는지 등을 설득해 나가야 옳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이 쏟아낸 비판에는 인신공격만이 난무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폐지론과 함께 개정론, 대체 입법론, 형법 흡수통합론, 현행유지론 등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국가 체제 보호 기능을 살리면서 인권 침해 등 악용의 위험을 없애는 방안인지 면밀히 검토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싸고 다시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법원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판결문을 통해 밝힌 지 3일 만에 노 대통령이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부를 대표하는 양대 축이 보안법 폐지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는데,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나서서 폐지의 정당성을 강조한 셈이다. 보안법 개폐 문제를 놓고 입법․행정․사법부가 둘로 쪼개져 정면충돌하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나라의 체제는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할 수 없다”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