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노래로 공황장애 극복 정강찬 변호사
‘노래는 나의 힘’슬픔은 치유, 행복은 배로
법원 울타리 나와 냉혹한 세계로
정강찬 변호사는 판사 시절, ‘꿈’을 많이 꾸고 실현하고 싶었지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판사로서의 직분, 일처리, 한정된 가용 보조인력, 시간의 한계를 늘 절감해야만 했다. 변호사가 된 지금은 그와 같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의 폭이 주어졌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와 손실도 있었지만, 대신 그걸 통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감해 했다. 변호사로서의 업무는 아무런 보장도 없고 리스크가 커지는 만큼, 기대되는 수익과 성취감도 그에 비례해서 커지기에 만족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2012년 2월 말경, 변호사로 개업한 정강찬 변호사. 그는 변호사로서의 업무는 ‘주문형 제작’ 시스템이라고 표방한다.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정도의 생산품도 있지만 편지만 전달해 주는 정도의 일도 있다. 수임한 사건의 난이도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판이하게 달라지는데, 그것을 따지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표면상으로는 간단한 일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파고들면 결코 간단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자다가도 순간적으로 번뜩 뜨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 그래서 정 변호사는 잘 때도 휴대전화를 옆에 놓고 잔다. 순간을 놓쳐 버리면 모든 것이 허송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도 전할 말이 있다면 휴대전화 예약전송 기능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끊임없이 스케줄링,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며 업무를 진행해 나간다. 이렇게까지 열심이인 것은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어서 이다.
“한 때 변호사 수가 20명까지 가고 직원의 수가 60명까지 불어 난 적이 있어요. 고정비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었죠.”
모든 것은 ‘블라인드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조직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업무의 속도가 나지 않으면 인력 부족이라고만 여겼고, 인력을 늘리면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조직원 저마다의 생각이 달라 빚어진 결과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 변호사는 법무법인을 이끄는 대표 변호사로서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게 아직도 부족한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주변의 조언은 많았지만 실제 경험이 없어 냉정한 현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세상사는 지혜을 얻은 것도 같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시, 로스쿨 ‘반반’ 비율
그의 법무법인에는 사시와 로스쿨 출신이 반반의 비율로 구성됐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박시후 사건 때, 정강찬 변호사는 7명의 변호사를 투입했다. 당시 박시후가 경찰과 언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매도를 당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수사기관과 언론에 대한 대응이 중요했다. 사건의 특성에 따라 경찰행정학과, 기자 출신들을 채용했다. 연예계 생리를 잘 아는 이들을 비롯해 검찰 수사관 출신과 더불어 법리적인 것은 대표 변호사인 그가 직접 맡아 했다.
정 변호사는 로스쿨 출신은 다양한 측면의 장점들이 있는 반면, 법리적인 것과 절차적인 것에 있어서는 사시출신들이 아무래도 강하다고 말했다.
"로스쿨 출신은 직장생활을 하다 로스쿨에 들어 간 친구들이 상당수인 만큼 사회경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시출신의 경우 법리적, 절차적인 실무에서 강하고요.”
로스쿨 출신의 경우, 사회생활을 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요구의 고객들을 상대로 공감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경쟁력이 있다. 다만, 법리적, 절차적인 실무에 있어서는 뼈를 깎는 고통을 느낄 정도의 전력투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사법시험이냐, 로스쿨이냐 출신을 따지기 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마인드 없이는 절대로 살아 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부 재발 판례에 개별 케이스를 도식적으로 꿰어 맞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답이 이미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소송이라는 동적인 프로세스에서 정답을 만들어 가고, 찾아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함께 정해진 틀이 아닌 열린 마음, 따뜻한 가슴, 그리고 냉철한 머리로 공감하고 모든 것을 종합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법조인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렇게 되고 싶어 했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명을 부르는 아이
판사 아버지 아래서 자라면서 법조인 외에는 다른 길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정강찬 변호사. 타인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랑스러운 반면, 원칙주의자로서의 엄격한 면모에서는 다정함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변호사이기에 앞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정 변호사는 다정다감하게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어 했다.
“영국 한인회 행사에서 금강산과 오 쏠레 미오를 열창했어요. 수많은 관객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 때부터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정강찬 변호사는 노래하는 판사로 유명했다. 변호사사 된 지금도 노래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더욱 뜨겁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과 딸도 음악을 한다. 그런데 활발한 성격인 그와 달리 자녀들은 내성적이고 남 앞에 서는 것을 창피해 했다. 어느 날 한인회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빠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본 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란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후 자신들도 학교 행사에서 독주를 했다고 자랑을 했다고 한다.
“사람마다 기질적인 것들이 있어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법조인의 길을 당연하게 걸어 왔지만 가슴 속에는 항상 뜨거운 열정이 있었어요.”
정강찬 변호사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면,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노래든 처음 유행하는 노래든지 저절로 흥얼대면서 다 외워 불렀을 정도였다.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거나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요청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청일점으로 합창부원을 했고, 방송에서도 독창을 여러 번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의 어린 시절은 노래와 음악에 관련된 이야깃거리들이 많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음악수업, 학생들 모두가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었다. 분명 합창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다른 사람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변을 살펴봤더니 모두 그의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 하도 몰입해 노래하는 모습에 담임선생님이 그 몰래 다른 아이들은 조용히 하게 한 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친구가 선물한 Luciano Pavarotti의 ‘World Famous Arias’ 테이프는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너무나도 황홀한 느낌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자신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형의 죽음으로 찾아온 공황장애...노래로 극복
사법시험 공부를 하면서 음악에 대한 즐거움보다는 뒤처지지 않으려는 생존경쟁에 열중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마음의 풍요로움이 상실돼 갔다. 사법시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갑작스러운 형의 사망으로 공포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런 슬픔과 공포심을 잊기 위해 일하고, 운동하고, 술 마시고, 하는 것들을 반복했다. 뭐든지 열심히 하면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공포심이 또다시 찾아왔고 급기야 실신해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기 일쑤였다. 1998년도부터 발생한 이러 증세가 2004년까지 지속됐다. 공황장애였다.
“노래는 공황장애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줬어요. 어느 날 그 틀 밖에서 내려다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지요.”
다행히 원인을 알게 되고 다시 음악을 접하면서 공황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노래에 입문한 것은 판사로 재직 중이던 2004년부터다. 해외연수를 떠가기 직전이고 업무적인 부담이 덜했던 시기였다. 자신이 기회를 만든 것이지만 운도 좋았다. 예술계의 대가 서혜경 교수에게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피아니스트 서혜경 교수는 정강찬 변호사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다. 지역에서 처음 가입한 클래식 음악동호회에서 초청으로 온 서혜경 교수의 연주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 정 변호사는 서 교수가 연주하는 모든 곡들을 열심히도 듣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서 교수가 장난삼아 반주를 해 줄 테니 노래를 불러보라고 제안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시작했고, 오 쏠레 미오를 마저 불렀다. 이후 노래를 가장 잘한다는 성악과 학생의 지도아래 일주일에 두 번씩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노래를 할 때 그 행복감이야말로 내가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성악 레슨에 열심히 집중하던 그 무렵, 한 피아노 회사 창사기념 음악회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그 제안이 끝나기도 전에 ‘Why not?’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 가슴 속으로만 품어 왔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정강찬 변호사의 음악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은인이 또 한 명 있다. 바로 처외삼촌이자 벨칸토 창법의 마지막 계승자인 김신환 테너이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1950년대 혈혈단신으로 파리로 건너가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인 라 스칼라에서 동양인 최초 솔리스트로 활약한 세계적인 테너로 꼽힌다.
“레슨시간에 주고받은 예술혼, 대가로서의 기운은 여전히 나에게 살아있습니다.”
또 다른 음악적 동료 내지는 은인으로 클럽예가 회장 오은숙 교수를 들 수 있다. 오 교수는 아마추어에 불과한 정 변호사를 회원으로 받아주고 코엑스 오디토리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충무아트홀 등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줬다.
“공연 때마다 열심히 응원해준 박시환 당시 대법관님께 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던 중 테너로서 무대에 서시게 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면서 만든 게 아마추어 성악가 및 연주자들로 구성된 푸르메 동호회입니다”
정 변호사가 회장을 하던 시절에 붙인 이름인데 나중에 변호사 사무실과 법무법인의 이름도 그대로 푸르메를 썼다. 회원으로는 김재승 변호사, 구자동 싱가포르개발은행 상무, 이상원 서울대 교수 등이다. 정말 음악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실력들도 엄청나다며 거기에 가면 자신은 중간에도 못 든다고 손사래를 쳤다. 평소에 부지런히 일하고 골프같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운동은 삼가면서 남는 시간은 노래에 매진했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꿈, 도전정신, 열정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라!
판사시절 정강찬 변호사는 정해진 틀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의를 추구했다. 그리고 답을 찾아서 현실에서 실현시켰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지혜,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법조인, 자신에게 재판받는 사람들이 ‘정말 재판 잘 받았다’, ‘결과에 상관없이 더 이상 원이 없다’는 만족감을 받게 해주고 싶었다.
“왜 판사를 지원했냐고 면접관이 물었을 때 원래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인간을 심판하는 역할을 하면서 솔로몬과 같은 지혜로 재판하고 싶다고 대답했었죠.”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은 가지고 있다. 변호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의뢰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억울함을 벗겨주고, 꿈은 함께 나누고 실현시키는 변호사를 꿈꾸고 실현해 나가고 있다. 그가 살아오면서 갈고 닦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 모든 잠재력, 그리고 그가 만들고 관리하는 조직 차원에서 의뢰인의 아픔과 꿈을 함께 나누고 서로에게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서비스를 하자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법조인들 특히 신규 법조인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충분하지 않고 시스템도 불안정하다는 것에 정 변호사 역시 공감했다. 더불어 법률시장 개방과 관련해 외국의 로펌보다 우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향후 통일시대까지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강찬 변호사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서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 한다. 법원의 울타리를 나와 험한 세상에 부딪히면서 인간에 대한 실망도 커졌지만 그러한 꿈이 그를 지탱해 줬다.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창조하고 싶어 했다. 창조의 영역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해 준 영역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적절한 휴식도 필요하겠지만 법무법인의 운영이 궤도에 오른 후에는 또 다른 영역의 창조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령 국민가곡을 작사․ 작곡하고 노래를 한다든가, 중도에 미뤄 둔 국제성악콩쿨사업, 그림이나 그 밖의 미술활동, 또 발명을 해서 인류가 존속하는 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어 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은 그의 영혼을 맑게 해주었고 마음의 부자로 만들어 줬다. 그리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 창조정신을 북돋아 줬다. 이아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