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저 인터뷰]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를 꿈꾸다 - 민변 박주민 변호사
‘배신’으로 통하던 사법시험 도전 이유
1990년대 서울대 법대 학생운동권 사이에선 사법고시에 도전하는 것은 ‘배신’으로 통했다. 학생운동에 전념했던 박주민 변호사는 대학교 3학년 무렵, 사시공부를 결심했다. 1996년 신도림동 세 가구만 남은 아주 작은 철거촌이 있었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 동기들과 함께 갈 곳 없는 이들과 그곳에서 거주하며 철거민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다. 며칠간의 여유는 벌수 있어도 조만간 철거민들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유일한 희망은 공공임대주택으로 입주하는 길이었다. 입주자격은 구청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어렵게 구청장과의 대면 약속을 받아냈고 드디어 만나기로 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 어른들은 물론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과 함께 아침부터 구청으로 향했다.
그러나 구청 진입부터 좌절됐다. 그렇게 꼬박 해가 지기 까지 하늘에서 내리던 눈을 그대로 맞으며 기다렸지만 끝내 구청장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꽁꽁 언 손과 발, 눈물로 얼룩진 철거민들의 얼굴...그렇게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변호사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졌던 것이다. 판.검사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어려운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만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어려운 이들의 사정에 마음이 아프거나 감정적으로 괴로움을 함께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농촌과 철거촌, 공부방에 봉사하러 다니면서 차츰 어려운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졌다. 남들이 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하자라는 강박이 있었을 정도였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왔던 것이다.
‘스터디 머신’ 주말, 밤낮 없어
군대 제대 후 본격적인 수험생활에 돌입하고자 했지만 이 길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는 IMF의 여파로 취업이 더욱 어려워졌던 시기였다. 박 변호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사법고시가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합격이 보장되는 시험인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친 박 변호사는 과거 철거촌과 농촌, 공장 등을 다니며 만난 힘없고 약한 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살아야 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되새겼다. 이처럼 강한 의지와 군대 제대 후 더욱 강해진 체력으로 수험생활에 임했다. 서울대 도서관에 불이 켜지기 전 가장 먼저 도착해 불이 꺼질 때까지, 주말과 명절도 없이 공부만 하다 보니 ‘스터디 머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공부 외에는 여유 따위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덕분에 1년 4~5개월 만에 합격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수험생활을 앞당길 수 있었던 요인은 그가 철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관심이 깊었던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재들의 집합소 대원외고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로지 공부만 했던 그였다. 대학생이 되면서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다. 그래서 선택했던 것이 학생활동이었다. 사회와는 가까워졌지만 학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래도 놓지 않은 것이 있다면 책이었다. 다른 운동권들과 달리 수업은 빠져도 매일 아침 2시간씩 책 읽는 습관은 꾸준히 지켜왔던 것이다. 사회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 프레임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현상을 주변 친구들과 분석,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로 인해 도움 될 때 가장 행복해
박 변호사는 남들을 위해 사는 삶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했다. 지난날 사법연수원에서 판?검사를 희망하는 이유를 ‘엄마가요, 아빠가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타인의 시선을 잣대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간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던졌다.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잣대에 의해 명예와 지위를 욕심내고 있는 것이라고.
“타인의 고민을 듣고 해결해 주는 것은 어느 변호사나 마찬가지죠. 이왕이면 타인의 개인적 고민보다는 사회적 고민을 해결하는데 힘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몸담고 있는 박주민 변호사. 그가 말하는 민주사회란 국민이 주인인 나라이다. 그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시대를 위해 일한다고 말했다. 철거민들과 함께 추운 겨울날을 함께 나며 결심한 변호사로서의 길. 어려운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진정한 행복감은 자신의 영달이 아닌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줬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다고 전했다.
연수원을 졸업한 박 변호사는 로펌행을 택했다. 그곳은 전문적인 법률지식과 실무를 배울 수 있으면서도 공익활동을 제한 없이 허용하는 곳이었다. 참으로 많은 사례를 다뤘고 제각기 다른 사건을 동시에 맡으면서 멀티테스킹 능력도 길러갔다. 그런 경험을 통해 일에 대한 주저함이 없어졌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 와도 자신감을 가지고 대처할 수 있게 됐다. 로펌과 공익활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고 동분서주 하던 시기였다. 그런 그를 온전히 공익활동에 전념하도록 한 사람이 등장한다. 현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정원 손해배상 청구당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박 시장이 걸어온 길을 보며 ‘언제까지 타협적으로 살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던 것이다. 타인이 자신으로 인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 가장 행복했다.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840명의 변호사들로 구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사회의 부조리와 제도의 모순에 대해 끊임없이 발언한다. 제도개선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입법까지 될 경우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박 변호사는 야간집회금지 헌법불합치판결의 주인공이다. 그 당시에는 집시법에 관한 논문이 거의 없었고 있어도 경찰에서 쓴 것이 다였다. 각 대학의 교수들과 팀을 짜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사례를 한 사람씩 맡아서 사례를 준비했고 토론회도 정말 많이 했다. 그렇게 노력해 헌법재판소 공개변론 기회도 얻어냈다. 당시 집시법 조문에 대해 합헌이 나왔던 상황이어서 큰 기대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얻어낸 결과여서 박 변호사에겐 더욱 의미가 깊다.
“일주일은 밥 안 먹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헌법불합치 나고 공소가 취소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실질적인 효과를 봤죠.”
박 변호사는 당시 촛불 집회가 있었고 정부에서도 법무부 차관이 공개변론 때 참석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사건이었다고 기억했다. 집시법조항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후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이처럼 실질적인 도움을 줬을 때는 기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을 때는 한탄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가장 힘든 점은 이러한 노력들이 진영논리로만 바라볼 때이다. 주장의 당부를 가지고 판단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박주민 변호사가 예비법조인들에게 “지금은 변호사라는 직역이 예전과 비교해 경제적인 보상과 사회적인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막연히 변호사가 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 길에 들어오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항상 법률과 권리에 대한 것을 다루다 보니 기본권, 사회제도와 밀접한 곳에서 업무를 하게 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만 고민하지 말고 사회전체 다른 사람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유의미한 일을 하면 보람을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
이아름 기자 desk@lec.co.kr